그런 날이 있다. 저녁밥 대신 시원한 맥주 한잔에 치킨이 땡기는 날. 그것도 배달시켜서 먹는 치킨말고 쿰쿰한 냄새나는 호프집에서 갓 튀겨나온 치킨과 거품이 반쯤 찬 생맥주 한잔을 먹고싶은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마침 둘째가 시험이 끝나는 날인데 저녁에 약속이 없다니 혹시나 하고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둘째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집에 와서 잠을 잘거라고 했던 거라서 진짜 혹시나 했다. 그런데 웬일로 바로 오케이란다. 앗싸~~!!!!
아이를 기다리며 집 근처 호프집의 메뉴를 훑어보고 있다. 그런데 큰일이다. 치킨도 먹고싶고, 골뱅이 소면도 먹고싶고, 훈제족발도 먹고싶다. 둘이서 먹는데 그걸 다 시킬 수도 없고 뭘 먹어야할지 무지하게 고민된다. 입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 열흘이 넘도록 냉전중인 남편도 불러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이다.
아이가 왔다. 이제 출발~
어두컴컴한 조명의 호프집에는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한 테이블밖에 차있지 않았다.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고민 끝에 선택한 메뉴는 결국 후라이드 치킨. 물론 생맥주도 빼놓지 않았다. 시원한 생맥주의 첫 모금과 바삭한 치킨의 첫 입은 과연 천상의 맛이었다. 누가 처음 치킨과 맥주를 짝지웠는지 노벨과학상(치맥은 과학입니다!)을 주고 싶다.
첫째랑은 종종 밖에서 술을 마시곤 했지만, 둘째랑 단둘이서 마신건 처음이었다. 상대는 달랐지만 나눈 얘기는 비슷했다. 주로 아빠(남편) 흉보기. 큰애를 붙잡고 아빠 흉을 봤던게 후회되어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술이 들어가니 그 다짐이 깨져버렸다. 사실 요즘 남편이 너무 미워서 흉을 안볼래야 안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의 반응이 좀 달랐다. 둘째는 성격이 남편과 많이 닮아서 가끔 둘째를 보면서 남편을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적으로 내편이 되어주던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다가 나중에 딴소리를 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이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내 스타일 때문에 아빠도 엄마만큼 힘들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가 너무 달라서 그런거니 더 나이들면 서로 떨어져서 살란다. 그러게... 남편이 싫은건 아닌데 같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니 떨어져 살면서 가끔 만나면 좀 나으려나?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취기가 오르면서 나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쏟아놓았고 아이는 잘 받아주었다. 둘째는 항상 어리게만 보였는데 어느새 엄마에게 위로와 충고를 해줄 정도로 훌쩍 자라있었다. 나는 아이가 열살 때나 스물세살인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은데, 아이만 철이 들어가나보다. 늘 나를 커다란 산처럼 생각했던 아이들에게서 요즘은 가끔 '으이그~ 우리 엄마, 쯧쯧쯧...'하는 눈빛을 느끼곤 한다. 씁쓸하기도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어차피 이제 같이 늙어가는거니까. 사실은 엄마노릇이 좀 버겁기도 했거든.
살랑살랑 봄바람 부는 날에 딸래미와 함께 한 술자리가 참 기분좋았다. 아이와 조잘거리며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와 있었다. 아주아주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뭐, 없는 데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다음달에 큰애가 나오면 큰애랑 또 한잔 해야겠다. 그때는 눈치 안보고 남편 흉을 실컷 봐야지. 큰애는 내편이니까!! (나 취했나보다. 정신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