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싶은 일을 했을 때와 하기싫은 일을 끝냈을 때 중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음... 아무래도 나는 후자인 거 같다. 하기싫은데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고나면 마치 개학 전날 방학동안 밀렸던 일기를 다 쓰고난 것처럼 개운하고 후련하다. 내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 그래서 하고나면 속이 시원한 일 두가지가 욕실 청소와 김치 담그기이다.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뒹굴고 세면대에 회색빛 물때가 끼어있고 변기안에 정체모를 둥근 띠가 희미하게 생겨날 때 쯤이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하고 미루다가 공중 화장실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청소를 한다(욕실 청소를 매일 한다는 김 모씨는 아마 이해를 못할 것이다. 나도 그녀를 이해 못하는 건 마찬가지). 똑같은 화장실을 쓰면서도 다른 식구들은 더러운 게 안보이는 건지, 아님 나보다 참을성이 강한 건지,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늘 내가 한다. 청소를 마치고 반짝반짝 빛나는 세면대를 보면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며 도파민이 마구 샘솟는다.
예전에 엄마는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에 꼭 여름내 먹을 김치를 담그셨다. 이름하여 여름김장! 장마가 끝나고나면 배추가 물을 먹어서 맛이 없어지고 값도 비싸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요 며칠 맑은 하늘을 보기가 힘들고 비가 오락가락 하는 걸 보니 벌써 장마가 시작된듯 하고, 마침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김치통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김치 없이는 못사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으니 우리 집에서 김치가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는 일인데, 나는 김치 담그기가 너~~무 싫다.
여름 배추가 맛이 없다는 핑계로 김치를 주문해볼까 하고 가격을 알아보니 그새 값이 많이 올랐다. 10kg에 71000원, 거기다가 배송료 3000원까지... 10kg이라고 해봤자 김치통 한통밖에 안되는데 그 정도면 우리 식구(아니 남편!)는 한달도 채 못먹는 양이다. 계산기를 두드리니 당연히 직접 담그는게 이익이다(내 인건비는 늘 빼놓는다는게 함정).
운동삼아 유기농 매장까지 30분을 걸어가서 젓갈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배추를 샀다. 배추만 샀어야 했는데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얼갈이와 열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리속에는 열무김치에 말아먹는 시원한 열무국수가 떠올랐다. 더운 여름철에도 줄어들지 않는 이 죽일 놈의 식욕이란 참... 김치를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왜 싱싱한 배추나 열무만 보면 욕심이 솟아나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배추와 열무, 얼갈이에 커다란 무까지 계산이 끝나있었다.
우리 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김치를 담글 줄 알았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도 결혼전까지는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었지 김치를 담그려면 배추를 미리 절여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28년동안 김치 집착남과 살면서 갈고닦은 솜씨가 이제 거의 김치 장인(?)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장인의 솜씨로 반나절만에 뚝딱 세가지(배추김치, 열무얼갈이김치, 깍두기) 김치를 담갔다.
커다란 다라이에 수북하던 김칫거리가 김치통 반통도 채 안차서 도둑맞은 기분이었지만(그 와중에 좀 더 많이 할 걸 후회했다) 세개의 김치통을 보니 어찌나 행복하던지,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허리는 좀 아팠지만, 그래도 내가 수고를 한 덕분에 돈을 절약했다고 혼자 뿌듯해 하고 있는데, 방에서 통화를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럽하우스, 라운딩 어쩌고... 친구들과 골프약속을 잡는 눈치였다. 순간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뜨겁고 묵직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며 나의 신파가 시작되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김치를 담그는데... 나는 겨우 몇만원 아끼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데 누구는 팔자좋게 비싼 골프나 치러다니고, 내가 미친x이지... 저 김치를 확 없어버려? 남편이 방에서 나오면 한바탕 퍼부어 줄 생각이었다.
선풍기(그 와중에도 에어컨은 못트는 이 궁상이라니!) 앞에서 땀을 식히며 앉아있으니 잠시 외출했던 이성이 다시 돌아왔다. 남편은 김치를 그냥 사먹자고 했지만, 김치를 담그겠다고 한 건 나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굳이 김치를 담그려고 했을까. 알뜰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걸까...아니면 28년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뼈속 깊이 박혀버린 습관 때문일까... 아니면 하기싫은 일을 하고난 뒤에 맛보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궁상 DNA 때문일까... 아무튼 이런 내가 참 별로다.
사실 내가 김치를 직접 담가서 절약한 돈 몇만원은 지금 우리 형편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이게 다 남편이 아직 돈을 벌어오는 덕분이다. 으잉? 왜 의식의 흐름이 이 모양으로 흐르는지, 남편에 대한 전의가 사그라들었다. 싸워봐야 뭐 하겠나.
그나저나 남편이 내일 골프를 치러간다니 저녁 걱정은 덜었다. 이래서 아직 이혼을 안하고 사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