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길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치신 엄마를 보살펴 드리며 지난 겨울 꽤 많은 시간을 친정에서 지냈다. 거동이 불편한 엄마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종일 수다떠는 일밖에는 없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한참 글쓰기에 빠져있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살아오신 인생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고, 그 시작으로 블로그에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한편을 썼다.(https://blog.naver.com/allesgute69/223000174338)
그리고 엄마에게도 글을 써보시기를 권했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었던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약해지신 엄마도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냥 웃어넘기셨다.
"에이, 내가 무슨 글을 쓰냐?"
"엄마도 쓸 수 있어. 엄마가 생각하는 걸 그냥 글로 적으면 되는 거야."
"글은 배운 사람들이나 쓰는 거지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엄마가 밥하기 싫을 때 '밥하는게 너무 싫다. 나는 평생 밥만 하다가 죽을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쓰면 되는 거야. 생각나는대로 말하는 것처럼."
© aaronburden, 출처 Unsplash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하셨던 엄마는 늘 못 배운 것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사셨다. 남들 앞에서는 조심하느라 말 수를 줄이셨고, 자식들이 학교에서 임원이라도 하게되면 엄마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데 그 컴플렉스 때문에 남 앞에 나서는 것이 창피해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무식한 게 탄로날까봐 남 앞에 나서는 것이 늘 조심스러우셨단다. 그런 엄마에게 글을 써보라는 건 언감생심 말도 안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랬던 엄마가 요즘 간간히 글을 써보고 계시단다. 소일거리 삼아 시간 보내시라고 가르쳐 드린 휴대폰 게임을 기대 이상으로 잘하시는 걸 보면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에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글도 쓰실 줄은 몰랐다. 내가 썼던 엄마 이야기를 읽어드리자 그 다음도 이어서 써보라고 엄마의 처녀시절 이야기며, 결혼 이야기, 아이들 키우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놓으셨었다.
누구나 자기 얘기가 가장 재미있는 법, 내가 먼저 블로그에 써놓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셨던 모양이다.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깬 어느날, 달력을 한장 뜯어 사등분으로 접어 뒷면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단다. 글을 어떻게 쓰냐 하시던 엄마가 달력 한장을 꽉 채우는데 30분도 채 안 걸리셨단다. 대강 들어보니 책 한권으로도 모자를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한장의 달력에 그야말로 '요약'을 해놓으셨다.
'~~~ 이만하면 그래도 내 인생 잘 산 거 아닌가.'
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쓰셨다는 마지막 문장을 듣는데 코 끝이 시큰했다. 엄마에게 글쓰기를 권할 때 엄마가 꼭 느끼셨으면 했던 마음을 그대로 담아놓으셨다. 내가 해드리고 싶었던 말을 엄마가 스스로 찾으신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 계정으로 블로그를 만들었다. 엄마에게는 생각나는 일들을 무엇이든 다 써보시라고 했다. 블로그에 엄마가 쓰시는 글들을 하나씩 옮겨드릴 것이다. 엄마의 글을 차곡차곡 쌓아 엄마 이름이 새겨진 책도 만들어 드리고 싶다.
엄마 나이 벌써 여든 넷! 마음이 조급해진다. 10년만 더 일찍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