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Sep 14. 2023

늙는다는 건...


부모님 사이에서 이쪽도 저쪽도 편을 들 수 없을 때가 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두 분 모두 왜 그러실까 이해가 안 될 때가 종종 있다.


철저하고 정확한 성격의 엄마 눈에 아버지는 늘 허술해 보이시는 것 같다. 아버지가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젊은 시절에는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지만,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사시다가 집안에 들어앉으시고부터는 생활 만렙인 엄마의 눈에 아버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로 전락해버렸다.


아버지는 귀가 얇아 광고 전화에 넘어가서 필요없는 물건을 사시고 뒤늦게 다시 무르는 일이 종종 있으셨다. 물론 그때마다 뒷수습은 주로 엄마가 해오셨는데 그 과정에서 두 분 사이에 꼭 언쟁이 오고가고 분위기가 냉랭해지곤 했다.



좀처럼 먼저 전화를 하시지 않는 엄마가 며칠 전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오셨다. 대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휴대폰을 공짜로 바꿔주겠다는 광고 전화에 아버지가 승낙을 하셔서 택배로 휴대폰 기기를 받았는데, 기종도 구식이고 마음에 들지않아 반품을 하려는데 발신자와 연락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의심이 많은 엄마는 무슨 큰 사기라도 당하신 듯 목소리가 격양되어 두서없이 상황 설명을 하셨고, 엄마의 통화를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함을 치시고 계셨다. 짐작컨데, 예상과 다른 물건을 받아 아버지도 당황스러운데 엄마가 딸한테까지 아버지의 실수를 알리고 흉을 보시니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아버지가 휴대폰 개통을 위해서 직원이 방문할 거라고 했다는데도 엄마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걱정을 늘어놓으셨고, 그럴수록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 점점 싸움으로 번져가는 듯 했다. 물건을 돌려보내는 일보다 부모님의 싸움을 말리는 일이 더 급한 것같아, 돈을 낸 것도 아니고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다시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그래도 통화가 안되면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워낙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서 혹시라도 피해를 당할까봐 모르는 사람의 호의는 일단 의심부터 하신다. 보이스피싱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 사건들이 많아지면서 엄마의 이런 성격은 더욱 심해져서 광고 전화는 아예 응대를 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문자를 받을 때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꼭 확인을 하시곤 한다.


또, 직접 물건을 사면서 값을 지불하는 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엄마에게 물건을 받기 전에 돈부터 내야 하는 인터넷 쇼핑은 영 미덥지 않은 거래방식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 드리면 물건이 올 떄까지 몇 번을 확인하시고, 어쩌다가 배송이 늦어지면 혹시 돈만 떼이는 건 아닌지 안절부절 못하신다. 덕분에 사고날 걱정은 덜 해도 되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의 지나친 조바심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엄마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잘 알아보시지도 않고 한다고 해서 피곤한 일을 만드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뒷수습을 위해 내가 신경을 써야 되는 상황도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어느 순간 아버지가 자괴감을 느끼고 계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짜 기기에 저렴한 통신요금은 누가 들어도 구미가 당길만한 조건이었는데도, 마치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핀잔을 듣고 딸에게까지 알려지는 민망한 상황에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았다. 비록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이었더라도 엄마가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셨더라면, 아니 딸에게 전화를 하시더라도 아버지가 듣지 않게 하셨더라면 아버지의 자존심이 덜 상하셨을텐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 역시도 남편이 그리 미덥지 않다. 남편은 자신의 직업 이외에 다른 일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어쩌다 남편에게 일을 맡기면 남편의 일 처리가 허술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헛점을 지적하고 핀잔을 주고는 했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대부분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도 내 기준으로 너무 남편을 몰아세웠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어쩌면 30년 후에 나도 지금 엄마의 모습과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mbennettphoto, 출처 Unsplash



그러고 보면 부모는 늙어서도 여전히 자식의 거울인 것 같다.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늙음을 준비하게 된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속에서 어느새 나도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늙어가는 건 점점 약해지는 것이고, 약해지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 많아진다는 걸 부모님을 보면서 깨달아 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세월과 쌓아온 경험만큼 더 너그러워지고 여유로워질 거라는 기대는 어쩌면 늙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가진 늙음에 대한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늙음'을 이해하고,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다녀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