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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Sep 24. 2023

지금의 나도 나쁘지 않다.


큰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 둔 게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7년 반동안 일했던 그때가 아마도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나는 젊었고 젊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나를 똑부러지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나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나조차도 잊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회사에서 가깝게 지냈던 옛 동료, A와 B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들은 사내결혼을 한 부부이다. 10여년 전쯤에 A는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B씨는 퇴사후 처음 만났다. 그들과 우리는 몇달 간격으로 비슷하게 결혼을 했고 같은 해에 첫아이를 낳았다. 나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퇴직을 했고, 내가 퇴직을 하고나서 3년쯤 후에 A도 퇴직을 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는 가깝게 지냈는데 어쩌다보니(사실은 내가 너무 무심해서) 서로 연락이 끊겨 만나지 못했다.



결혼 전에 남편도 한번 만난 적이 있어 부부가 함께 만나기로 했다. 옛 직장동료들끼리 만나는 자리에 끼기가 불편하다며 가고 싶어하지 않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 주말저녁에 B씨가 정한 약속장소로 나갔다.


"어머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네."



25년 세월이 우리에게만 비껴갔을리가 없는데도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나누는 대화는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음은 25년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 동기 ㅇㅇ알죠? 걔가 회사에서 최초로 여성임원이 되었잖아요. 언니가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니셨더라면 언니가 그자리에 계셨을텐데..."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살면서 수없이 해봤던 가정들이다. 남자직원과의 차별이 공공연하던 시절, 능력에서만큼은 뒤쳐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참 열심히 일했었다. 설렁설렁 일하다가 야근을 신청하고 회사에서 저녁만 먹고 퇴근하는 남자직원들은 때가 되면 모두들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하루종일 쉬지않고 일을 해서 근무시간내에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내 뒷통수에 여직원은 일찍 집에 가서 좋겠다고 비야냥 거리는 소리가 꽂혔었다.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내 모든 전의를 상실했던 게. 편찮으신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시던 친정엄마께 아이를 맡겨놓고 한시간반이나 결리는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아둥바둥 사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졌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깰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그때 좀 더 버텼더라면...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이 꺼내놓는 옛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참 빛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남편의 표정이 궁금해서 쳐다보았다.


'잘 듣고 있나? 나 그런 사람이었어!'



© kelsoknight, 출처 Unsplash



분위기에 취하고 옛날 감상에 젖어 술이 좀 과했다. 마치 예전에 회식자리에서 술을 몰래 버려가면서 분위기를 맞추고 자리를 지키며 사회생활을 했던 그때의 기분이 느껴졌다.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남편이 먼저 식사비를 계산했다. 회사 임원이 되어있는 B씨가 우리를 대접하겠다며 비싼 한우집으로 예약을 한건데, 한껏 분위기에 들떠있는 마누라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는지 내 기를 폼나게 살려주었다.(그냥 집에서나 잘할 것이지)



우리는 자리를 옮겨 가볍게 한 잔을 더 한 후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내 전성기 때 나를 알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 젊음과 패기가 있었던 그 시절만큼 여유와 깊이가 있는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내가 친했던 사람들이 잘 살고 있어서 너무 좋다... 나도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이다...



그동안은 잘 나갔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늘 지금의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내 인생이 아깝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그저 그때는 그랬지 하고 즐겁게 추억할 뿐 지금의 나와 비교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님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지금의 내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안식년을 통해서 점점 채워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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