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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Dec 21. 2023

부모님의 장수사진, 집에서 신나게 찍었다.

사진작가인 조카는 이번 성탄절 연휴에 본인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드리는 기부 촬영을 하기로 했단다. 장례 때 상에 올리는 사진을 일컫는 말인 '영정사진'은 죽음을 떠올리게 되어 거부감을 준다고 해서 언젠가부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장수사진'으로 바꿔 쓰고 있다.


조카는 봉사하는 날 스튜디오에 방문하시는 어른들이 참고하실 수 있도록 샘플 사진을 찍기 위해 지난주에 외할머니(내 친정 부모님) 댁에 내려갔다. 나와 언니(조카의 엄마)도 부모님이 사진 촬영을 하실 때 어색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기 위해 함께 동행했다.


엄마는 지난 가을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도 교외로 나가 사진을 여러 장 찍었었다. 평소 늙어서 사진 찍기 싫다고 하시던 엄마가 나중에 영정사진으로 쓸 거라며 꽃밭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엄마는 15년 전인 70세에 찍어놓은 영정사진이 너무 오래 되어 다시 찍으려고 사진관에 갔는데 요즘은 자연스러운 사진을 쓴다는 말을 듣고는 예쁜 사진을 찍고 싶으셨다고 했다.

엄마는 유난히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죽는 걸 두려워하시는 분인데도 영정사진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고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으셨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가슴 찡했다. 아버지는 자식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는 것도 불편하시다고 올라오시지 않으시더니 나중에 엄마의 사진을 보시고는 부러워하시며 함께 오지 않은 걸 후회하셨다고 했다.


조카가 그때 할아버지 사진을 찍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이번에 겸사겸사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시력과 청력이 급격하게 나빠져 불편한 걸 못 참으시고 사소한 일에도 갑작스럽게 화를 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 촬영이 내심 걱정스러웠다.


조카는 서울에서부터 갖가지 촬영 도구들을 챙겨서 가지고 왔지만 부모님 댁에 내려간 날에는 하필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 촬영이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금이라도 자연광을 이용할 수 있도록 좁은 베란다에 장비를 설치해서 촬영을 시작했다.

 


우리는 장롱을 뒤져 이것저것 부모님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촬영이니만큼 멋지게 차려입으시라 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도와주질 않았다. 평소에는 편한 일상복만 입으시고 정장은 죄다 오래전에 산 것들이라서 변변히 입으실 만한 옷들이 없었다.


"아버지, 여기 보세요. 좀 웃으세요. 개구리 뒷다리~"

"이번에는 팔짱을 끼고 한쪽 손을 턱에 살짝 올려보세요. 와, 우리 아버지 회장님 같네."

"엄마, 몸을 옆으로 살짝 틀어서 앉아보세요. 엄마도 좀 웃어봐!"


아버지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옷을 몇 번씩 갈아입으시는 것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시는 것도 싫은 내색 없이 잘 따라주셨다. 오히려 오랜만에 근사하게 차려입으신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칭찬하는 딸들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 힘드실까 봐 한 분을 촬영하는 동안 한 분은 쉬시게 하며 번갈아 찍었는데, 처음에는 경직되어 있던 부모님의 표정도 시간이 갈수록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나중에는 스스로 자세를 바꿔가면서 촬영을 은근히 즐기셨다.


조카가 선물로 가져온 꽃을 들고 두 분이 다정하게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사진을 찍는 동안 우리는 참 많이 웃었고, 부모님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남기고 싶어 틈틈이 찍은 동영상을 함께 돌려보며 또 한번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조카는 휴대폰으로 완성된 사진을 가족 톡방에 올려줬고, 나는 그대로 부모님께도 전달해 드렸다. 우리는 사진을 함께 보며 그날의 유쾌했던 분위기를 다시 얘기 나누고 잘 나온 사진을 고르며 또 즐거워했다.


이제 막 스마트폰의 기능을 하나씩 익혀가시는 엄마는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셔서 사진을 저장하는 방법이며 다시 꺼내 보는 방법, 다른 사람에게 전송하는 방법 등을 물으셨다. 그때마다 같은 설명을 몇 번씩 반복해야 해서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들뜬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한 장 골라봐. OO이가 인화해서 사진으로 뽑아드린대요."

"영정사진?"

"에이 무슨 영정사진이야, 그냥 기념으로 가지시라는 거지."


엄마가 대뜸 영정사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순간 당황스러워 말을 얼버무렸다. 마치 잔치하듯이 시끌벅적하게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사진을 찍는 동안 부모님은 내심 자신들이 떠난 다음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볼 영정사진으로 생각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사실은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순간순간 부모님의 사진이 놓여있는 장례식장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의 영정사진은 부모님과 행복했던 추억을 담은 사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부모님은 자신들의 생이 끝나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하나씩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부모님의 부재에 대해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가고 있다.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 점점 의연해져가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배워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시겠지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부모님이 하루라도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이번 사진 촬영은 부모님에게 우울한 영정사진 촬영이 아닌 무료한 일상에 재미나고 색다른 하루를 선물해 드린 것 같아 흐뭇하다. 


부모님과 행복한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잔치처럼 즐기는 장수사진 촬영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모님과 자식들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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