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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Feb 12. 2024

숙제같은 명절이라도

설이 지났다. 숙제를 하나 끝냈다. 8시간이 걸려 시댁에 가서 2박3일을 어머님 걱정하시는 소리에 시달리다가 친정 부모님과 하루를 보내고 또 3시간반이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매년 하는 일이지만 늘 하기전에는 마음이 무겁고 끝내고나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다른 집보다 특별히 일을 더 많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잔소리만큼은 다른 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28년동안 드나들었어도 여전히 적응이 힘들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시골집이 여전히 불편하고 힘들다. 시어머니의 눈치를 무릅쓰고 나부터 살아야겠기에 두꺼운 요를 먼저 차지했었는데 그마저도 이번에는 없었다. 버리셨단다. 맨바닥에서 주무시는 시어머니께 요가 얇아 뻐마디가 너무 배긴다고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얼른 내쪽으로 깔고는 했는데 난감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나마 덜 불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하다보니 잠을 설쳤다.


저녁 8시도 안돼서 잠자리에 드시는 시부모님은 새벽 3,4시경이면 일어나셔서 활동하신다. 불편한 잠자리에 예민해져 나도 같이 잠이 깼지만 못들은 척하고 버텨보다가 결국 6시도 안되어 일어났다. 주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그 시간에 어머님이 혼자 전을 부치고 계셨다. "내가 잠이 안와서...". 그렇게 일찍부터 주무셨으니까...


시부모님은 뉴스를 열심히 보신다. 그리고 해마다 한가지의 단어를 머리속에 새겨넣으신다. 어느 해는 '보증', 어느 해는 '보이스피싱', 또 어느 해는 '화재'... 올해의 단어는 '마약'이었다. -물론 '건강'은 절대 빠지지 않는 고정 이슈이다.- 얼마전 뉴스를 도배했던 유명 연예인의 마약사건 때문에 시골 부모님에게 '마약'이 올 설의 가장 큰 걱정거리로 선정되었다. 부모님에게 선택된 올해의 단어는 2박3일동안 가장 많이 등장한다. 보증이나 보이스피싱에 대한 걱정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약은 좀...



90세 시골주부에게 56세 도시주부의 살림법은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아들 앞에 고봉밥이 놓여있어야 흐뭇하신 어머니에게 밥그릇의 3분의 2만 밥을 퍼주고, 다 먹으면 더 놓을 생각으로 접시에 반찬을 조금만 놓는 손 작은 며느리는 영 못마땅하다. 며느리가 여러 식구들의 젓가락이 여러번 들락거린 반찬을 행여라도 버릴까봐 먹다 남은 반찬을 반찬통에 얼른 부어버리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장자리를 한바퀴 훑어내신다.


시어머니는 평생의 농사일과 집안일로 관절이 다 망가져 무릎으로 기어다니시면서도 모든 걸 자신의 손으로 하셔야만 마음이 편하신 분이다. 며느리가 이제 그만하시라고 하는 말이 반갑지만은 않으신 것 같다. 아파도 일을 계속 하시는 시어머니가 안쓰럽다가도 일을 하고나서 아프다고 하시는 말이 듣기 싫다. 아프면 하시지 말든가, 하실거면 아프다는 말을 하시지 말든가... 하기야 나도 집에서 식구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다. 그떄마다 어머님과 나는 똑같이 생각한다. '어떻게 안할 수 있간디?'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아침상을 치우고 났는데도 7시15분. 남편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잔소리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어서인지 친정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배웅 나오신 부모님의 서운해 하시는 표정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가장 홀가분하면서도 가장 마음이 불편한 시간이다.


친정집에 들어서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 청소부터 했다. 아버지는 전날 청소를 했다고 말리셨지만 지저분한 세면대와 변기를 사위들과 며느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손님이니까. 나도 시댁에서는 집안 이곳저곳을 손님의 눈으로 보기도 하니까.


성묘를 마치고 들어오시는 엄마의 얼굴이 부어있었다. 자식들 먹일 음식을 장만하느라 무리를 하신 것 같았다. 심장이 약해서 무리를 하시면 안되는 친정엄마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신다. 부은 얼굴과 가끔 몰아쉬는 숨으로 엄마가 힘든 걸 알아차린다. 며느리의 눈으로 보는 시어머니보다 딸의 눈으로 보는 친정엄마가 늘 더 안쓰러워 보인다. 며느리는 남이고 딸은 피붙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엄마가 장만해 놓으신 명절 반찬들이 많았지만 저녁에는 피자를 시켜먹었다. 딸에게 끼니를 맡기지 못하시는 엄마를 위해서 한끼라도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애들을 꼬드겼다. 밥상을 차리고 설겆이 하는 시간을 줄이니 엄마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생겼다. 남은 반찬은 자식들에게 나눠서 싸주셨다.


아버지는 자고가지 않는 걸 서운해 하셨지만 우리 때문에 잠을 설치고 뒷정리에 또 힘드실 엄마를 생각해서 저녁을 먹고 바로 나섰다. 역시나 배웅을 나오신 부모님이 짠해 보였다. 그나마 두분이 함께 계시니 다행이다 싶었다.


요즘들어 부모님이 오래 사시는 것이 해야 할 숙제를 늦추는 것 같아 기쁘지만은 않았다. 점점 아픈 곳은 늘어가는데 딱히 해드릴 수 있는게 없어 끝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여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고백하자면 정말로 백세를 사시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까지도 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른 감정이 들었다. 부모님이 곁에 계셔주시는 것이 알게 모르게 큰 힘이 되는구나, 부모님이 계시니 가족들도 모일 수 있는 것이고, 불편하고 힘들지만 이런게 사람 사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아직 곁에 계시는 이 시간이 너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부디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시기를...


명절을 보낼 때마다 부모님과 함께 나도 나이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지만 마음은 편안해진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고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부담스러운 명절 숙제를 끝내고 난 다음 홀가분함에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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