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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l 13. 2024

참 까다로우시네!

여행 3일차_갈등이 시작됐다.


계획대로라면 오늘 세인트폴 대성당을 제일 먼저 갈 생각이었는데, 어제 야경투어 때 미리 다녀와서 대신에 마지막 순서였던 버킹검 궁전을 먼저 가기로 했다. 버킹검 궁전이라면 당연히 근위병 교대식을 보아야 하지만, 나는 예전에 한번 봐서 이번 여행에는 넣지 않았다. 11시30분에 스카이가든을 예약해 놓은 상태라서 얼른 궁전만 보고 올 생각이었는데 딸내미가 궁금하다기에 일단 가서 근위병 교대식을 볼 지, 스카이가든으로 갈 지를 다시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시각에 여행객들이 거의 다 교대식을 보러 그곳에 모인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다. 궁전앞에 도착한 순간, 세상에나! 사람이 사람이... 겹겹이 둘러쌓인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그렇게 작은 키가 아닌데도 아무리 까치발을 해도 근위병의 검은 모자 끄트머리만 겨우 보일랑 말랑 했다. 딸내미는 사진이라도 찍어보려고 핸드폰을 높이 쳐드는데 등 뒤로 돌아가 있는 가방이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열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아이에게 가방을 앞으로 라고 얘기했더니 가방안에 중요한 물건도 없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자고로 엄마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는데 왜 말을 안듣는건지, 몇번은 좋게 말하다가 나도 그만 버럭 화를 냈다.



결국 교대식 보는건 포기하고 스카이가든으로 가려고 했지만 통행로까지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몇분을 더 서 있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인데도 짜증이 잔뜩 배인 아이의 표정이 신경쓰여 나도 기분이 상했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웃으며 "유튜브로 보는게 낫겠네"(리스닝은 좀 되는데 롸이팅은 안됨)라고 하시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엄지척을 하며 "댓스 굿 아이디어!" 라고 외쳤다. 나도 딸내미도 그런 여유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스카이가든 예약시간에 늦을까봐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서 겨우 도착, 35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무료입장이 가능한 스카이가든에도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티켓이 없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옆으로 미리 신청해서 받은 바우처를 의기양양하게 내밀며 먼저 입장했다. 실내에 식물원을 조성해놓은 스카이가든은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날씨가 흐려 아쉬웠지만 어제 보았던 타워브릿지와 세인트폴 대성당도 보였고 빅벤과 런던 아이의 윗부분도 살짝 보였다.



아이가 버킹검 궁전에서의 뒤끝이 아직 남아있는지 틱틱 거리는 말투가 거슬려 잠깐 거리를 두고 각자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둘이서 계속 붙어다니다보니 아이의 기분을 계속 신경쓰게 되고 아이의 기분에 따라서 내 기분도 오락가락해져 피곤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런던의 재래시장인 버로우마켓. 여기도 주말의 광장시장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버로우마켓의 마약김밥인 해산물 빠에야를 먹었는데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 그냥 그랬다. 사람이 너무 많고 앉을 곳도 없어 한쪽 구석에 서서 먹었는데 딸내미가 좀 힘이 들었나보다.



아이가 겁이 많고 안전에 대한 걱정이 유난히 많다는건 알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크게 받는 모양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걸 특히 힘들어했다. 게다가 시장에서 뭘 사먹어 보려고 해도 낯선 음식들을 선뜻 고르기가 어려워 서로에게 선택을 은근히 떠넘기게 되었는데, 이거는 이래서 싫고 저거는 저래서 싫다는 아이에게 그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참 까다로우시네!" 내 말에 마음이 상한 아이가 돌아서 눈물을 삼키는게 보였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다.



스트레스 받을 때는 역시 단 게 최고다. 초콜릿을 뿌린 딸기를 사먹고나서 기분이 나아져 시장을 나왔다. 그리고는 지난밤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여성 갱년기와 불면증에 좋은 영양제를 사러 갔다. 원래 약을 잘 안사는데 요즘 잠을 잘 못자는 날이 많아지니 몸에 좋다는 말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혹 하게 된다.



런던에 와서 파란하늘 보기가 힘들었는데 상점에서 나오니 뭉게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예술이었다. 아이는 모든 계획을 접고 무조건 빅벤을 다시 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물론 사진! 이때부터 사진 지옥이 또 시작되었다. 어제 봤던 웅장했던 빅벤의 머리위에 파란하늘과 뭉게구름이 더해지니 진짜 멋지기는 했다. 아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쪽으로 내려가는 거리를 특히나 마음에 들어했다.



화창해진 날씨에 어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 한복판에서 같은 길을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찍고, 빨간 버스가 지나갈 때 맞춰서 찍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따라 파란 하늘이 움직이는대로 사진을 찍어댔다. 거리 풍경을 찍다가는 어제처럼 내 목에 가방을 걸어주면서 다시 모델 포즈를 취하며 자기를 찍으라고 했다. 이번에는 동영상까지 추가되었다...



나는 남이 좋으면 나도 좋다. 아이가 사진 찍는걸 마냥 기다려주는게 힘들었지만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즐거웠다. 기다리다 찍어주다를 반복하다가 지칠 때쯤 코벤트가든으로 갔다. 서울에 있는 같은 이름의 파스타집은 많이 가봤는데, 런던의 진짜 코벤트가든을 보니 그 이름을 가져다가 붙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내인 듯 아닌 듯한 공간에서 낮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자유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우연히 들른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동을 느꼈을 때가 아닐까? 코벤트 가든 안쪽 광장에 교회가 있길래 나 혼자 무심코 들어갔는데 흑인 성가대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소심해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밖에서 보는데 그 노랫소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그 넓은 공간의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교회가 오히려 그곳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어서 감동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짧게라도 각자 혼자의 시간을 가져야할까 보다.



영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음식, 피쉬앤칩스를 먹기위해 가이드가 추천해 준 타워브릿지 근처 식당으로 갔다. 6시45분 예약이었지만 타워브릿지를 직접 건너보고 싶어서 좀 일찍 도착했다. 예전에 왔을 때도 먼 발치에서 사진의 뒷 배경으로만 남겨놓았지 올라가보지는 못해서 이번에는 꼭 올라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근처에 오니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들어 망설여졌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내가 또 언제 올까 싶어서 마지막 힘을 쥐어 짜서 올라갔다.



다리 위에서 보는 타워브릿지는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다리 위에서 윤슬이 비치는 템즈강을 내려다 보는 것도 너무 멋있었다. 게다가 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들리는 모습은 여간해서는 런던 사람들도 보기 힘들다는데 어젯밤 야경투어 때에 이어서 두번이나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가면 로또라도 사야할까 보다. 아니 그 행운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데 쓰였으면 좋겠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생선까스와 감자튀김일 뿐인데 맛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 했는데, 이제까지 내가 먹었던 피쉬앤칩스랑은 완전 달랐다. 튀김이 전혀 느끼하지 않아 끝까지 맛있게 먹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니 당연히 맥주도 한잔 곁들였다. 그래 이 맛을 느끼고 싶어서 내가 이 멀리까지 왔지.



사실 나한테 런던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23년만에 다시 온 런던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첫번째 왔을 때는 겉모습만 보였다면 이번에는 내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품위가 느껴진다고 할까, 영국 사람들이 왜 자부심을 가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제 런던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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