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이동하는 날이다. 기차를 타고 가지만 나라를 이동하는 거라서 2시간전에는 기차역에 도착해야 한단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거 같아 그 전에 가까운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영화 '노팅힐'에서 나온 북샵에 가보고 싶었지만 아이가 원하는대로 하이드파크에 갔다.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다가 길 옆에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여 들어가보니 거기가 바로 하이드파크였다. 이렇게 코앞에 있는줄 알았으면 아침에 아이가 깰 때까지 숨 죽이고 누워있을게 아니라 공원 산책이라도 할 걸 그랬다.
입구로 들어서자 초록의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고 길을 따라 안으로 걸어가니 눈앞에 넓은 호수가 쫘악... 헐! 와~, 대~~~박.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멋져 외마디 소리만 나왔다. 사람보다 더 많은 오리와 백조, 그리고 걔네들이 발디딜 틈 없이영역표시를 해놓은걸 보니 정작 그곳의 주인은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며칠동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리들이 떠다니는 잔잔한 호수를 따라 걸으며 런던에서의 일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여행에서 진짜 행복한 순간은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고 맛난 것을 먹을 때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이 기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하이드파크는 그야말로 런던여행의 완벽한 마무리였던 것 같다.
런던에서 파리를 2시간반만에 갈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하기야 유럽에서는 국경이 어딘지도 모르게 국경을 넘는게 예사로운 일이니 2시간반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겠다. 하이드파크에서 좀더 있고 싶어 하는 아이를 재촉해서 일찍 나섰더니 판크라온역에 너무 일찍 도착했다. 늦는 것보다는 기다리는게 낫고,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우는 것도 왠지 눈치가 보여 서둘렀더니 아이는 그런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나는 늦는다고 재촉하고 아이는 괜찮다고 찡그리는 모양새가 꼭 우리 부모님과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나도 아이 눈에는 융통성 없고 답답해 보이겠지 생각하니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엄마 아버지가 한시간 전에 역전에 나가신다고 해도 이해해 드려야겠다.(그래도 한시간은 좀...)
유로스타를 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다가 전 열차까지 지연되는 바람에 플랫폼은 북새통을 이뤘다. 빈자리를 겨우 찾아서 아이와 떨어져 앉았는데, 아이가 옆자리 외국남자와 웃으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여행지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뭐 그런건가? 그래, 이 엄마는 아빠를 만나는 바람에 이 생에서는 텄으니 너라도 잘해봐라! 혹시라도 이 애미가 너에게 혹이 된다면 기꺼이 떨어져 주마! 나중에 아이에게 무슨 말을 나눴는지 물어보니 에펠탑이 잘보이는 한식당을 알고있으니 같아 가자고 작업을 걸더란다. 그런데 까칠한 딸래미는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나? 아쉬워하는 나에게 "엄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함부로 따라가면 큰일 나!". 아쉽긴 하지만 아이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는 귀가 멍해질 정도(지금 생각하니 내가 잠을 못자서 멍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로 빨랐다. 2시간쯤 지나 핸드폰의 시각이 저절로 바뀌는 걸 보니 이제 프랑스에 들어온 것 같았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로 가는 기분에 들떠 가족 단톡방에 '오늘부터 나는 파리지앵~'이라고 썼다.(나중에 찾아보니 여자는 '파리지엔'이란다) 아무튼 잘있어라 런던, 반갑다 파리!
파리 북역에 도착해 숙소를 찾아가는 길, 그놈의 캐리어가 또 문제였다. 아니 런던에 이어 그 흔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하나 없는 파리의 지하철역이 문제였다. 파리에서 악명높은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해 핸드폰과 지갑을 가방 안쪽에 걸어 놓았더니 지하철을 탈 때마다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가방과 백팩을 앞뒤로 메고 캐리어를 들어서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왠 수상한 남자 둘이 우리 아이를 보면서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뭐라고 얘기하는 모습이 어째 느낌이 쌔했다. 혹시 소매치기가 아닐까 의심스러워 바짝 긴장해서 가방과 캐리어를 더 꽉 붙잡고 있었다. 그냥 순진한 청년들이 좀 불량스럽게 생긴 것 뿐인데 내가 오해했던 거라면 이 지면을 빌어서 쏘리를 전한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왠 남자분이 도와주시겠단다. 런던에 이어 파리에서까지? 내가 좀 글로벌하게 먹히는 얼굴인가 했는데, 뒤에 있던 딸내미에게 나를 가리키면 도움이 필요하겠냐고 묻더란다. 그럼 그렇지, 그들 눈에도 딸내미는 팔팔한 젊은이로, 나는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글로벌한 노약자로 보이는구나...
숙소가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라더니 다 뻥이었다. 최소한 15분은 걸린 것 같았다. 게다가 오르막길인데다 마지막 몇 미터는 울퉁불퉁한 돌길이어서 캐리어를 제대로 끌 수도 없었다. 분명 후기에는 좋다는 얘기들 뿐이었는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우리 방은 2층, 또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드디어 방에 들어서니 더이상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겠고 침대에 얼른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딸내미가 에펠탑 야경을 보러 나가잔다. 파리에 온 걸 느끼고 싶다나 뭐라나.지난 사흘간 하루에 두 세시간밖에 못자고 버텼더니 어질어질하고 정신이몽롱해서뭘 봐도 좋은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아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따라나섰다.
많은 블로거들이 에펠탑이 제일 잘 보인다고 추천하는 곳으로 찾아갔는데 올림픽 때문에 모두 막아놓았다. 깜깜한 밤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그냥 에펠탑이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걷다 보니 그나마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아이는 그렇게 보고싶어 했던 에펠탑이 보이자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사진을 수백장은 찍는거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아이에게 잠시 옆으로 비켜달라고 했다.몇 장만 찍고 금방 갈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찍으니 결국 아이는 다시 밀고 들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더이상 비켜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두사람간의 모종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내 마음에는 아이가 사진을 충분히 찍은거 같은데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 같아 보였다. 좀 양보를 해주라고 하니 자기가 먼저 찍고 있던 자리라며 오히려 나에게 짜증을 냈다.
잠을 못자 골골거리는 엄마를 생각해서 그만 하고 숙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내 생각은 전혀 안해주는 거 같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왜 그렇게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냐고 화를 냈다. 아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 그러고도 한참을 더 사진을 찍었다. 나는 여행 기분을 망치고 싶지않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냥 기다렸다.이번 여행을 오기전 준비도 나 혼자 다했고 무거운 배낭도 계속 내가 메고 다녔고, 다니는 동안 전속 사진사 노릇까지 해줬는데 어쩌면 저렇게 엄마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해 주는지 너무나 야속했다. 마음같아서는 먼저 숙소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걸으며숙소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돌덩이 같았다. 에잇, 파리지엔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