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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l 17. 2024

파리에서 거리두기

여행 5일차_대판하고 나니 아이가 달라졌다.


어제는 런던에서 산 불면증 영양제를 먹어서 그런지 여행와서 처음으로 좀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이 많이 아팠다. 아무래도 추웠다 더웠다 하는 파리 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평소에 감기는 몇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해서 감기약은 챙겨오지도 않고 배앓이약만 잔뜩 챙겨왔는데 감기라니 난감했다. 아직 여행 초반인데 아프면 큰일이다 싶어 타이레놀을 주워 먹었다.



아침에 몽마르트에 갈 예정이었는데 비가 내렸다. 그 다음 계획은 11시30분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예약을 해놓아서 몽마르트에 가지 않으면 시간이 애매하게 남게 되었다. 컨디션도 안좋으니 숙소에서 쉬었다가 나갈까도 했지만, 아침을 먹어야했기에 나는 아이에게 나가자고 했고 아이는 시간이 애매하다며 예약시간에 맞춰서 나가자고 했다.



나는 아침을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제시간에. 내가 아침을 먹지않는 날은 건강검진을 받는 날 뿐인데, 그날도 검사가 끝나면 바로 먹으니 사실 안먹는 날이 없다. 하지만 아이는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 편이라서 아침을 챙겨먹으려고 하는 내가 피곤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못다니겠네!" 아이가 속의 말을 내뱉었다. 어젯밤의 앙금이 남아서인지 말투가 곱지 않았다. "먹는 걸 안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못다니겠네!" 나도 맞받아쳤다.



결국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파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우리보다 며칠 먼저 다녀간 친구에게 받은 맛집 리스트들 중에서 크라상과 에끌레어가 맛있다는 빵집을 찾아갔다. 에끌레어는 너무 달아서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크라상과 뺑드쇼콜라는 정말 맛있었다. 크라상을 한입 베어물면 겉은 바삭 부서지면서 속살이 쫀득한게 그맛이 예술이었다. 좁은 빵집 한구석에 서서 진한 커피 한잔과 크라상을 먹으니 진짜 파리지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와서 느끼는 거지만 먹는 것 하나에 기분이 금새 바뀌는 걸 보면 나는 진짜 참 단순한 사람인 것 같다.



아침을 먹고나서 나는 피카소 미술관에 가자고 하고 아이는 옷을 갈아입으러 숙소에 다시 들어갔다 오고 싶다고 했다. 날씨가 생각보다 추워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오후에 미술관 일정이 두곳이나 있으니 그전에 미술관을 또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한번 삐지면 뒤끝이 길게 가는 아이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기에 그럼 따로 갔다가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만나자고 하니 아이가 성질을 내고는 돌아서서 말도 없이 걸어갔다.



아이 뒤를 쫓아가며 그럼 숙소로 같이 갈까 하고 물어도, 아님 따로 갔다가 나중에 만날거냐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고구마 백만개는 먹은 것처럼 속이 꽉 막힌듯 답답했다. 나도 그냥 돌아서 버리고 싶었지만 낯선 곳이라 아이가 걱정스러워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참을 뒤쫓아갔는데, 그냥 돌아설까 말까 고민하면서 걸음을 늦췄더니 그만 아이를 놓쳐버렸다.



그리고나서 나는 피카소 미술관으로 갔다. 아이를 쫓아가느라 미술관과 많이 멀어져서 다시 가는데 한참이 걸렸다. 파리는 어디를 가나 입장절차가 까다로운데 이번에도 아침에 먹다남은 에클레어가 문제가 되었다. 아침에 빵집 점원이 말을 잘못 알아들어 한개를 더 넣는 바람에 남은 것을 들고 다녔는데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시간이 얼마 없는데 지하에 내려가 짐을 맡기고 다시 올라오려니 관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피카소 미술관에는 내가 알고 있던 피카소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른 작품들이 있어 흥미로웠지만, 아이가 신경쓰여 관람을 하는둥 마는둥 하고 20분도 안되어서 나왔다.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위해 역을 찾아가는데 중간에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길 위에서 핸드폰 데이터도 작동이 안돼 이 골목 저 골목 해매느라 그만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아이와의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 우버 택시를 불렀는데, 2분후에 도착한다는 택시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택시의 기사가 무서워 보여서 택시 타기가 겁나 호출을 취소하고 다시 지하철역을 찾아갔다.(그리고 이틀후 우버택시 취소 수수료를 거의 만원 가까이 물었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에게 늦을거 같으니 미술관에 먼저 들어가라고 메세지를 보내고 지하철을 탔는데, 올림픽 때문에 내가 내려야 되는 역에 서질 않고 그냥 통과해버렸다. 게다가 콩코드 광장도 막아놓아 코앞에 있는 미술관을 한참 돌아서 가야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아이랑 같이 움직일걸 그렇잖아도 겁이 많은 아이인데 혼자서 긴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도착했다. 아이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오디오 가이드까지 빌려서 설명을 들으며 여유있게 미술관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아이에게는 꽤 괜찮았던지 그 이후에는 아이가 먼저 다른 미술관에도 가겠다고 나섰다. 나와 헤어진 후에도 숙소로 안가고 세느강변에 갔다는데 내가 길을 잃고 헤매는동안 아이는 혼자 좋은 시간을 보낸 눈치였다. 아이가 괘씸해서 엄마 없이 어디한번 혼나봐라 하는 마음이었는데 도리어 내가 벌칙을 받은 꼴이 되어 버렸다. 어찌됐든 그 이후로 아이는 많이 달라졌다. 나만 바라보던 아이가 적극적으로 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으니, 확실히 교육(?)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오랑주리 미술관을 찾은 이유는 모네의 작품 '수련'을 보기 위해서였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서 보았던 모네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이곳에 전시된 다른 작품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미술관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모네고 뭐고 작품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이를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미술관을 그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2시에 또 루브르 박물관 투어 예약이 잡혀있어 오랑주리 미술관을 대강 훑고 나왔다. 파워 J인 나지만 이번에는 느긋하고 여유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의도치않게 나조차도 따라가기 힘든 슈퍼 울트라 파워 J 강행군이 되어가고 있다.



파리 여행에서 루브르 박물관만큼은 제대로 보고 싶어서 투어를 신청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레오나르 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에 간다고 하지만,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루브르 박물관을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눈으로만 훑고 싶지는 않았다.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도 들으며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박물관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지만 가이드를 따라 들어가니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에 남아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최초의 흔적을 제일 먼저 본 후에 층을 올라가며 작품들을 관람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때는 "아하~", "그렇구나", "정말?" 하며 재미있게 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머리속에 남는건 별로 없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와 나폴레옹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과 왕의 력이 얼마나 강했고 왕실이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정도만 느낄 수 있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거의 볼 수가 없어서 감동을 느낄 수도 없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 그림이 왜(분명히 설명을 들었는데) 유명한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여성 민중운동가를 그린 그림이 훨씬 감동적이었는데, 그런 소재의 그림이나 이야기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잔다르크의 사돈의 팔촌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투어가 끝날때쯤 모녀가 서로 껴안고 있는 그림앞에서 가이드가 모녀 참가팀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오전의 일로 아이와 서먹해져 투어중에도 계속 적당한 거리를 유지중이었는데, 다행히도 딸내미가 사진찍는걸 허락해 주었다. 그나저나 참 오랜만에 안아보았다.



오전에 힘을 빼서인지 3시간의 투어는 좀 힘들었다. 지친 몸으로 박물관을 나오는데 유명한 마카롱 가게가 보였다. 마카롱 킬러인 딸내미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때는 무표정이던 얼굴에 금새 생기가 돌았다. 딸내미에게는 마카롱이 그 어떤 것보다 나은 피로회복제인 것 같았다. 심통 부릴 때마다 한개씩 사줘야 될까 보다.



마카롱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딸내미가 이번에는 밝을 때의 에펠탑을 보고 싶다고 해서 히르하켐 다리로 갔다. 가서 보니 첫날 에펠탑을 보러 갔었던 곳 바로 옆이었다. 첫날 우리가 찾아가긴 제대로 찾아갔었나 보다.



낮에 보는 에펠탑은 화려했던 밤의 에펠탑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낮의 에펠탑은 300미터 높이의 철탑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다소 위압적인 느낌이 들었다.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파리에서 에펠탑은 높이가 무려 300미터나 되어 파리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고, 더욱이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탑이라고 하니 과연 파리의 상징이 될 만한 것 같다.



파리에 내리면서부터 딸내미는 매일밤 에펠탑 야경을 보겠다고 별렀지만 오늘은 그냥 일찍 숙소로 돌아가(주시)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어쩌면 골골거리는 엄마를 나름 배려해주느라 그런 건 아닌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잠자리에서 꼭 안아주었다. 우리 내일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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