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여행을 뒤늦게 하루 더 늘리는 바람에 오늘 숙소를 시내 호텔로 옮겨야했다. 어제 늦어서 못들어갔던 오르세 미술관을 아침에 가기로 해서 숙소의 체크아웃을 일찌감치 했다. 48시간짜리 파리 뮤지엄 패스를 이용하려면 호텔에 짐을 맡기고 늦어도 10시까지는 오르세 미술관으로 가야했다. 그러고보니 파리에 와서는 하루도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은 날이 없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오르세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은 관심 없다던 아이가 오르세 미술관을 꼭 가야한다며 먼저 나섰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밀레, 고흐, 모네, 르느와르 처럼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1층을 대강 둘러보고 유명한 작품들이 모여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익히 알고있는 작품들을 보니 반가웠다. 모네와 르느와르의 작품은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서로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고흐 작품은 순탄치 않았던 삶 때문인지 작품이 대체적으로 선이 굵고 투박했다. 예전에는 고흐의 강한 터치가 좋았는데, 지금은 모네나 르느와르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더 마음에 든다. 딸내미에게 물으니 고흐 그림이 더 좋단다. 그러고보면 그림 취향도 나이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시간여유가 있으면 좀더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는데 나오기가 아쉬웠다.
다음은 몽마르뜨 언덕으로 갔다. 치안이 안좋다는 말이 많았지만, 나에게 몽마르트 언덕은 예술가의 거리이며 낭만적인 이미지였어서 기대가 컸다. 베레모를 쓴 거리의 화가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장면이 내가 가지고 있는 몽마르트 언덕의 이미지였다. 푸니쿨라를 타고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가니 파리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사람이 너무 많고 내가 기대했던 거리의 화가들 대신에 팔뚝에 팔찌를 강제로 채우고 강매하려는 잡상인들이 많았지만, 언덕위의 성당과 언덕을 따라 펼쳐져 있는 푸른 잔디밭이 참 예뻤다.
오후에는 딸내미가 파리에서 꼭 사야할 것들이 있다며 쇼핑을 해야한다고 했다. 미리 매장과 쇼핑 목록을 검색해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단체 패키지 여행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쇼핑 때문인데, 자유여행을 와서도 쇼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게 감기가 옮았는지 어제 저녁부터 몸이 안좋다고 하고 오전에 다니는 동안에도 내내 힘들어하던 아이가 갑자기 쌩쌩해져서 앞장을 섰다. 그래서 나는 지갑을 열고 아이를 따라다녔다.
처음에 들른 곳은 우리나라의 올리브영 같은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런지 한국인 종업원이 여럿 있었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나눠 줄 선물과 나도 엄마 드릴 선물을 몇가지 골라 담으니 가격이 만만치 않게 나왔다. 대부분 우리나라에도 있는 제품들이어서 굳이 여기에서 사야될까 싶었지만, 아이도 나도 유럽여행을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지에서의 쇼핑도 여행의 큰 재미가 된다고들 하니 아이가 실컷 고르도록 기다려줬다.
다음은 메르시 매장을 찾아갔다. 목적은 에코백을 사기 위해서였다. 뭔가 했더니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았던 평범한 에코백인데, 파리 매장에는 한국에 없는 다양한 색상이 있고 특별히 'PARIS'라고 적혀 있다나? 나참, 그것이 뭣이 중헌디? 나한테는 에코백 하나에 5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더 중허구만. 그래도 같이 여행왔으니 기념될 만한 거 하나는 사줘야겠다 싶어서 아이의 가방 색상 월드컵에 열심히 동참했다.
마카롱에 이어서 딸내미의 자양강장제 투는 아무래도 쇼핑인 것 같았다. 지칠 줄 모르고 이번에는 파리 슈퍼마켓에 과자를 사러갔다. 그렇잖아도 짐이 많은데 부피가 큰 과자를 사는게 마땅치 않았다. 집에 가져가면 다 부셔질 것 같아서 아이를 설득해 몇개만 고르게 했다. 자기가 안 부셔지게 잘 가져갈 거라더니 결국 내가 남은 여행내내 베낭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다.
둘째를 데리고 여행을 오면서 집에 있는 큰애가 마음에 걸렸다. 일 때문에 시간이 안맞아서 같이 오지 못한 것이지만, 그래도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큰애 선물을 뭐라도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비통 매장으로 갔다. 큰애가 자기도 명품이라는 걸 하나 가져보고 싶어서 친구들이 해주는 생일 선물에 돈을 같이 보태서 카드지갑을 샀는데, 그만 잃어버렸다며 무척 속상해 했었다. 현지에서 사면 훨씬 싸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일단 가격이나 비교해보자는 마음으로 갔다.
명품의 'ㅁ'자도 모르는 내 눈에는 특별히 더 좋아보이지도 않던데, 손바닥만한 카드지갑 하나가 엄청 비쌌다. 문 앞에서부터 VIP 대접을 받으며 들어가서 이것저것 꺼내서 구경을 했으니 안사고 그냥 나오기도 민망했다. 그래서 큰애와 영상통화를 하며 골라서 결국 카드지갑을 한개 샀다. 명품을 봐도 그게 명품인지도 모르는 내가, 그것도 파리 시내 명품 매장에서 쇼핑을 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런데 메르시 에코백에 좋아라 하던 아이가 언니의 명품지갑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가격도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싸니 다시 들어가서 자기 것도 구경을 해보겠다고 했다. 엄마가 두개까지 살 돈은 없는데...아이의 여행경비를 계산해 보면 그런 카드지갑 열개는 사고도 남을만큼 큰 돈이 들었는데, 아이는 마치 언니와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는 여행은 여행이고, 지갑은 또 다른 문제인가 보았다. 다행히도 딸내미가 원하는 색깔이 없어서 그냥 나왔는데 아이는 그때부터 말이 없어졌다. 나 역시 메르시 매장에서 비싼 에코백을 색깔별로 쓸어담던 모녀가 생각나며 기분이 씁쓸해졌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지만 몸도 피곤하고 입맛도 없어 그냥 숙소로 돌아가자니까 아이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에 어떻게 그냥 들어가냐며 싫다고 했다. 그럼 먹고싶은 것이 있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맛집을 찾아보라고 해도 모르겠다고 하고, 도저히 어쩌자는건지 난감했다. 여행하면서 제일 큰 문제가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그 지역의 대표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한 두번이지, 하루 세끼를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려니 고역이었다. 게다가 아이도 나도 몸이 아프니 입맛이 떨어져서 먹는게 더 힘들었다.
뭘 먹어야 할 지,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고, 몸은 너무 힘든데 말없이 앞서가는 딸내미 뒤를 따라가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왜 항상 부족하게 느낄까... 내가 좀더 능력있는 부모였다면... 이번 여행을 얼마나 어렵게 온건데... 너무 외롭고 서러웠다.
한참을 걷다가 맥주 한잔이 간절해져서 밖에 테이블이 놓여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간단하게 시킨 샐러드가 너무 푸짐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맥주 한잔과 맛난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금방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을 하면서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다. 특히나 남편을 많이 닮은 아이라서 아이를 통해 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아이의 속얘기를 많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함께 다니면서도 말을 많이 하고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깊이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 것까지 아빠를 쏙 빼닮았다. 그럼 이 다음에 딸내미는 엄마같은 남자를 만나게 될까? 그렇다면 사윗감으로 합격!(아빠한테는 물어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