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여행에서 제일 기대했던 곳, 베르샤유 궁전에 가는 날이다. '베르샤유'는 그 이름부터 뭔가 고급지고 비밀스러운 느낌인데다 어릴 때 만화 '베르샤유 장미'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베르샤유라고 하면 내 머리속에는 화려한 의상과 장식으로 멋을 낸 공주와 백작들이 온갖 음모와 계략을 숨긴 채로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교환하며 춤을 추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베르샤유 궁전은 한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9시30분 예약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도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궁전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궁전 내부는 예상대로 화려했다. 지금 봐도 웅장하고 화려한데 당시에는 얼마나 더 했을까. 딸내미에게 감상을 물으니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감탄사에 리액션이 없는건 남편이랑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나는 서로 느끼는 감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싶은데, 그래야 더 신이 나는 스타일인데 아이는 혼자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궁전에 들어올 때부터 아이의 모든 관심과 기대는 오로지 정원에 가 있었다.
사람들에 밀려 궁전 내부는 너무 대충 보고 정원으로 나왔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봤던 것들과 비슷해서 그냥 휙휙 지나쳤고, 멋진 거울의 방도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나도 빨리 정원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베르샤유 궁전은 나중에 다시 가봐야할 것 같다. 기회가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베르샤유 궁전은 정원이 하이라이트라더니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일단 크기에서부터 이게 정원인지 국립공원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다. 궁전위에서 보면 거의 끝이 안보일 정도였다. 보통 정원에 있는 그 흔한 분수대는 말할 것도 없고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까지도 있었다. 정말 루이 14세의 권력의 끝은 어디까지였는지, 이런 사치스런 왕 밑에서 과연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집에 돌아가면 루이 14세에 대해 좀더 알아봐야겠다.
정원을 둘러보고 카푸치노 한잔을 사서 호숫가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한가롭고 좋았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이어 또 한번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거의 반 이상이 한국 젊은이들이었다. 나도 이곳에서 피크닉을 했다는 블로그글을 몇번 본 적이 있긴한데, 아마도 젊은이들 사이에 필수코스인가 보았다. 그래도 여행이 너무 똑같으면 재미없는데...
조용하게 앉아있고 싶었는데 한 한국사람이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불어나 영어는 소리가 커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크게 방해가 안되는데, 한국말에는 귀가 솔깃해져서 안들으려고 해도 귀에 와서 콕 박혔다. 외국여행을 와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방해가 되기도 한다. 큰소리로 너무 길게 통화를 해서 속으로는 흉을 보면서도 나도 엄마가 보고싶어져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셨다. 아마도 돈 나갈까봐 또 데이터를 꺼놓으신 모양이었다.
그리고나서 다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집 앞에 저녁을 먹으러 나와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남편 얼굴을 보면 주책맞게 눈물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왠걸 마냥 신나고 좋았다. 무척 더워보이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약간 고소하기도 하고, 여행와서 밥을 안해도 되는 것이 새삼 얼마나 행복하던지... 내가 아직은 이 여행을 할만한가 보다.
오후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진 생트샤펠 성당으로 갔다. 성당의 규모는 작지만 벽면 전체와 천장까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너무나 근사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빛은 화려하면서도 성스럽게 느껴졌다. 좀 불경스런 말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분위기 깡패였다.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그곳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내미를 이해하게 하소서'
아이의 친구가 추천해 주었다는 프랑스 가정식 맛집을 찾아갔다. 프랑스 식당들마다 빠지지않는 메뉴인 양파수프와 오리 요리, 그리고 생선요리를 주문했다. 감기가 점점 심해져서 몸이 안좋아 따뜻한 국물을 먹고싶어 시킨 양파수프가 짜도 너무 짰다.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의 간이 좀 세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한 입 먹으면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짰다. 그냥 참고 몇 입 먹다가 다른 요리도 이렇게 짜면 어떡하나 싶어 종업원을 불러 너무 짜다고 했더니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고는 수프그릇과 커트러리를 몽땅 가져가버렸다.
내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거 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밥도 안주고 쫓아내려는건가 싶어 급하게 다시 불렀다. 다른 음식들은 좀 덜 짜게 해달라는거지 안먹겠다는게 아니다라고 하니 알았단다. 나중에 보니 커트러리는 요리종류에 따라 바꿔서 주는거였다. 다른 요리들도 대체로 좀 짜긴 했지만 그런대로 맛있게 먹고나서 음식값을 계산하려고보니 양파수프값이 빠져있었다.
음식값은 53유로, 순간 나는 60유로를 쾌척하고 의아해하는 종업원의 표정을 뒤로 하고서 의기양양하게 식당을 나왔다. 왜? 하는 눈빛은 딸내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도 엄마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 못하고 따라나왔다. 왜 그랬냐고? 저 사람들이 뭣도 모르는 동양인이 돈 덜내려고 먹다가 클레임 걸었다고 생각할까봐 그게 아니란걸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 그거 자격지심이야!" 나도 안다. 그리고 지금은 무지하게 후회하는 중이다. 7유로면 한국돈으로 거의 만원인데 팁으로 만원이나 주다니 내가 무슨 루이 14세도 아니고, 아이고 아까운 내 돈... 그보다 자존심 세우려다가 혹여 해외에 나와 개념없이 흥청망청하는 아시안 '봉'으로 보여지지는 않았을지... 그래, 이것도 자격지심이지!
숙소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재정비를 하고 개선문으로 갔다. 9시가 되어도 밖이 훤하니 개선문 전망대에 올라가 야경을 보려면 10시는 넘어야 했다. 노을이 비쳐서 개선문의 반쯤이 붉게 물들어 그렇잖아도 큰 개선문이 더 웅장하게 보였다. 개선문 전망대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원형교차로 한가운데 있는 개선문 주위로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고 횡단보도도 없어서 길을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지하로 내려갔다가 올라와도 계속 바깥쪽으로만 나오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무단횡단을 하는 방법밖에 없단다. "설마... 무슨 이런 미개한 나라가 다 있어?" 이런 대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라니 어의가 없어 한마디 했다가 그런 말 함부로 하는거 아니라고 딸내미에게 한소리 들었다. 그래, 그 말은 내가 잘못했다.
결국 우리는 무단횡단을 하려고 하는 또 다른 외국인들과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함께 무단횡단을 해버렸다.(돌아올 때 보니 지하로 길을 건널 수 있는 통로가 있긴 했다.) 개선문 전망대까지는 200여개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감기증상이 목에서 시작되어서 기침으로 넘어가 몸이 더 안좋아진데다 하루종일 걸어서 남아있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마지막 한방울(?)의 힘까지 쥐어짜서 올라갔다.
근사한 샹젤리제 거리의 야경을 기대하며 올라갔는데 내가 생각했던 거리를 뒤덮을 정도의 화려한 조명은 없고, 길가 상점들의 불빛이 전부였다. 그럼 내가 TV에서 봤던 건 뭐였지? 파리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야경도 그리 멋지지는 않았다. 그저 우뚝 솟아있는 에펠탑만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루브르박물관의 야경이 멋지다고 해서 다시 루브르박물관으로 갔다. 그런데 조명을 켜는데 시간제한이 있는건지 깜깜했다. 늦은 시간이라 인적도 드물고 몸은 무겁고, 딸내미와 나는 서로 아무 말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이 참 고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