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다. 비행기에서 먹었던 멀미약 덕분에 비행 동안은 잠도 잘자고 좋았는데 그 때문에 밤에는 한숨도 못잤다. 밖은 깜깜하고 자야할 시간이지만 내 몸은 한국시간에 길들여져 있는데다가 비행기에서 그렇게 잤으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한편 비행기에서 잠을 못잤던 아이는 옆에서 얄미울 정도로 잘잤다. 몇번을 시간만 확인하다가 결국 7시도 안되어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첫날, 하루종일 돌아다니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겠기에 먹기싫다는 애를 억지로 끌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이 호텔을 예약한 가장 큰 이유가 조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으니 아침이라도 찾아 먹어야 실망스러운 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란도 한개 안 주는 조식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제일 처음 간 곳은 런던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배경인 빅벤. 하루만에 런던 지하철을 마스터하고 큰 어려움없이 웨스트민스터역에 내렸다. 출구로 나오자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시계탑에 저절로 '와~'하는 탄성이나왔다. 23년전에 왔을 때는 먼 발치에서 보았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빅벤 빅벤' 하는구나 싶었다.
역시 관광지는 관광지였다. 단체 견학 온 꼬맹이들부터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어르신들까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그 엄청난 인파속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딸내미 찍사! 그것도 꼭 자기 핸드폰으로만 찍어야 한단다. 아이폰이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온다는건 인정하지만, 악명높은 유럽의 소매치기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방에 매달아놓은 핸드폰을 건네받으려면 아이의 가방까지 받아 목에 걸어야 했다. 내 가방까지 두개를, 하나는 어깨에 걸고 또 하나는 목에 걸고서 사람들을 피해가며 열과 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줬건만, 돌아오는건 번번이 "엄마 이게 뭐야!"하는 핀잔뿐이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는 이미 산발인데다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 사진이 예쁘게 나오길래 나도 따라서 똑같이 찍었더니 에잇, 도저히 못봐주겠더라.
강 건너 런던 아이도 배경으로 사진을 몇장 더 찍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를 못찾아 한참을 헤매다가 갔는데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단다. 도착한 시각이 11시쯤 이었는데 1시30분 티켓이 가장 빠른 것이었다. 티켓을 예약하고 남는 시간에 내셔널갤러리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내셔널갤러리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여기도 미리 예약을 했더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무료관람이라고 해서 예약이 필요없는 줄로만 알았다. 미리 좀더 알아볼 것을... 내셔널갤러리에는 엄청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림에 대해서는 1도 모르고 목표지향적인 나는 수많은 그림들을 헤치고 미술시간에 배워 알고있는 고흐와 모네의 유명한 작품들을 찾아 돌진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고흐의 '해바라기'와 모네의 '수련'! 역시 아는 맛(아니 그림)이 주는 감동이 컸다. 특히 모네의 작품들은 뭔가 아련함이 느껴지며 그림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정말 좋았다. 평소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동경하는 나는 아이가 그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고 바랐지만, 작품들보다 그 작품을 보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심취해있는 아이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나는 아이의 찍사로 바빴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웨스트민스터사원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배가 고팠다. 사원 앞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햄과 치즈가 들어간 바게트를 사서 급하게 먹는데, 차갑고 뻣뻣했지만 역시나 시장이반찬이었다.길위에서 바게트를 뜯으니 내가 진짜로 배낭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신이 났다.
지금도 영국에서 왕의 대관식을 비롯한 왕가의 각종 행사가 치러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내부가 무척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곳은 왕족들과 위인들의 무덤이 같이 있어서인지 보통 유럽의 대성당들에서 느껴지는 중후함보다 더 큰 중압감이 느껴졌다. 한국어로 나오는 가이드 오디오를 들으며 내부를 둘러보는데 내가 서양사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는게 아쉬웠다. 이제라도 책 좀 읽어야지 싶은데 나는 이제 눈도 잘 안보이니 딸내미 너라도... 에휴, 그것도 아닌가보다.
늦은 점심으로 소호거리에 있는 스테이크 맛집을 찾아갔다. 런던의 또 하나의 심볼인 빨간색 이층버스를 탔는데 꽉 막힌 도로 때문에 낭만은 커녕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역시 낭만도 내 컨디션이 좋을 때나 낭만이지, 낭만 좋아하다 스테이크도 못먹을 뻔 했다.
런던의 야경을 구경하고 싶은데 밤 늦게 돌아다니기가 살짝 겁이 나 아침에 급하게 야경투어를 찾아보았다. 야경명소를 돌아보는 것 뿐만 아니라 펍에서 맥주도 한잔하고 템즈강 유람선을 타는 것까지 포함된 투어가 있어 신청했다. 가이드만 쫓아다녀야 하는 패키지여행이 싫어서 자유여행을 선택했지만, 여행 중간에 한번씩 가이드 투어를 끼워넣으면 새로운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어 여행이 훨씬 다채로워질 것 같았다.
투어에 참가한 팀은 총 7팀, 12명이었다. 혼자서 여행하는 청춘남녀가 4명, 친구 모임 1팀, 그리고 우리처럼 엄마와 딸이 함께 온 팀이 1팀 더 있었다. 보조개가 예쁜 가이드를 따라서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시작해서 6번이나 결혼을 했었다는 헨리 8세의 스토리를 비롯해서 영국에 대한 여러가지 재미난 얘기를 들으며 테이트모던, 밀레니엄 브리지, 세익스피어 전용극장을 거쳐 제일 기대했던 펍에 들어갔다.
자리는 자연스럽게 청춘남녀들끼리, 친구모임끼리, 모녀팀끼리 나뉘어져 앉았다. 비록 몇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고 다시 볼 일은 없을지라도,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한껏 들떠서 신나게 얘기하는데 딸내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투어가 끝나고 왜 아무 말도 안했냐고 물으니 자신에게 별로 의미도 없는 사람들한테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단다. 그래?... 내가 낳았지만 나랑은 참 많이 다른 것 같다.
엄마가 찍어주는 사진이 영 성에 안찼던 딸내미는 가이드님이 찍어주시는 사진들이 마음에 들자 타워브릿지를 뒷배경으로 온갖 모델 포즈를 취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어찌나 민망하고 부끄러운지, 그야말로 부끄러움은 전부 내 몫이었다.
야경투어까지 하루를 꽉 채우고 숙소로 돌아와 누웠지만. 몸은 너무 피곤하고 힘든데도 여전히 시차 때문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변기 낯가림도 없어야 여행을 잘 할 수 있는데, 여행오면 잠도 못자고 먹는만큼 싸지도 못하는 나는 아무래도 여행 체질이 아닌가 보다. 그럼 눕자마자 잠들어버린 딸내미는 여행 체질인건가? 아무래도 젊어서 그렇겠지... 너는 좋겠다. 젊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