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의 마지막 날, 그다음 날부터 유류할증료가 오른다는 말을 듣고서는 덜커덕 유럽행 왕복 항공권을 끊어놓았다. MBTI 유형에서 극 J인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즉흥적으로 일을 저지른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출발 3개월 전에 취소하면 수수료가 없다는 것.
28년간 주부로서 성실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유럽 여행을 생각했지만, 어디 유럽이 제주도 옆에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나. 시간 여유와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일인데도 아무런 계획 없이 항공권만 덥석 잡아놓았는데,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여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기간이 임박해서 예약을 하면 가격이 비싸진다고 해서 지난 연말에 숙소를 미리 예약했다. 그것도 취소 수수료가 없는 곳으로만 골라서 했다. 그때까지도 ‘진짜 갈 수 있으려나’, '못 가면 말지' 하는 마음이었다. 항공권 무료 취소 기한이 지나고, 환불이 안되는 기차표를 예약하면서부터 여행에 대한 준비(무엇보다 마음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취소를 할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틈만 나면 여행 블로그와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나는 20년 동안 벼르고 벼르다 겨우 한번 가는 유럽 여행을 남들은 참 쉽게도 다니는 것 같았다. 내가 여행하려는 곳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설레다가도 사람들이 추천하는 숙소나 맛집을 찾아보면 엄청나게 비싼 숙박비와 음식값에 입이 떡 벌어졌다. 여행지에서 일일투어나 액티비티를 하나 해보려고 해도 그 비용이 몇십만 원은 훌쩍 넘었다.
이런저런 경비를 계산해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행 가서 숨만 쉬고 손가락만 빨다가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대한 비용을 덜 들이면서도 알찬 여행이 되도록 계획을 세워보려니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50이 넘으면 나도 2~3년에 한 번씩은 비즈니스를 타고 세계 여행을 다니는 여유로운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사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인생의 반을 살고보니 이제야 알겠다.
애초에 이번 여행의 목적은 독일 뮌헨에 다시 가보는 것이었다. 남편이 뒤늦게 유학을 가면서 나도 같이 공부할 수 있을 거라 꿈꾸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아이만 키우다 왔던 애증의 도시 뮌헨에 꼭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때의 눈물과 한숨이 지금은 추억으로 남은 그곳을 이제 성인이 된 아이와 함께 옛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을 다녀와서 시큰둥해하는 남편과 직장생활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아이 대신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나에게 찾아와 배 속에서 잠깐 그곳에 있었던 둘째와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서 둘째에게 같이 가자고 하기는 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떠나는 유럽 여행을 친구가 아닌 엄마와 함께 가겠다는 아이가 좀 의아했다.
요즘 아이들은 친구와 같이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자칫 트러블이 생겨서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해 짧은 여행은 친구와 긴 여행은 주로 가족과 간다고 했다. 그렇게 이미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여럿이 있어서인지 아이는 엄마와 둘이서 가는 것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다. 사춘기 나이가 지나서 이제 좀 나아졌나 싶다가도 순간순간 왜 저러지 싶은 MZ세대 딸내미와 18일 동안 과연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후덜덜한 여행 비용만큼이나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인 남편을 쏙 빼닮은 딸이니...
항공권의 출발 시각을 몇 번씩 확인하고, 환전해 놓은 외화들을 여기에 넣어다가 저기에 넣었다가 하느라, 캐리어에 옷가지들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고, 햇반과 라면을 넣었다가 덜어냈다가 하느라 나는 하루종일 정신없는데 딸아이는 사진이 예쁘게 나와야 한다며 네일아트를 받으러 나간단다.
과연 MZ 딸내미와 꼰대(이 나이는 대부분 그렇게 취급받는다) 엄마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