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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l 09. 2024

"캔 아이 헬프 유?"라고?

여행 1일차_런던에 왔다.


공항이다! 비행기 출발시각이 당겨져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괜찮다는데도 굳이 공항까지 데려다준다는 큰애 덕분에 일찌감치 편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데 운전하는 것이 신경쓰여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공항에 갈 때의 설움을 겪어봐서 잘 안다며 자기가 특별히 수고를 해주겠단다. 운전을 귀찮아하는 아빠와 운전을 어려워하는 엄마가 해외 전지훈련을 떠날 때에도 공항에 데려다주지 않았던게 무척 서운했던 모양이다. 남편의 게으름 덕분(?)에 이번에는 내가 호강을 한다.



공항은 언제 와도 늘 설렌다. 매끄러운 바닥에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이미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기분내는건 딱 거기까지. 내 앞에는 장장 열 네시간의 비행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되게 보이도록 꾸안꾸 공항패션을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헐렁한 츄리닝바지에 티셔츠, 누가봐도 '안꾸'패션이다. 열 네시간동안 좁은 좌석에 구겨져 있으려면 '꾸'패션은 포기해야 한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디어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미리 멀미약을 먹었더니 영화 한편이 끝나기도 전에 잠이 쏟아졌다. 졸다가 주변이 웅성거리면 일어나서 나눠주는 걸 받아먹고 또 잤다. 오랜만에 장거리 국제선을 타보니 세상 많이 좋아졌더라. 병원밥 다음으로 맛없던(지극히 개인적인 입맛임) 기내식이 언제 이렇게 달라졌는지 돼지불고기에 묵밥, 닭(볶음탕인 것 같은) 요리까지, 상상도 못했던 메뉴들에 맛도 하나같이 훌륭했다.



주는 것마다 깨끗이 비워내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먹는게 영 시원치 않았다. 걱정스러워서 조금 더 먹어보라고 했더니 입맛이 없다며 짜증을 냈다. 뭐야, 이제부터 시작인거야? 흥, 안먹으면 네 배가 고프지, 내 배가 고프냐? 이번 여행의 첫번째 다짐이 '잔소리하지 않기'라는 걸 다시 되새기며 나는 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아이가 무섭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칫, 잔소리 듣는건 싫어하면서도 이럴 때는 엄마가 필요한가 보네. 아이가 커서 이제 더이상 내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시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오랜만에 다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제대로 못한 아이를 위해 컵라면을 주문해주고, 담요도 다시 덮어주었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손도 더 꽉 잡아주었다. 엄마의 책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했던 내가 아이를 챙겨주며 흐뭇해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내가 엄마이긴 한가보다.



잘 자고 잘 먹었더니 제일 걱정했던 비행기에서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런던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제일 먼저 한국에서 사온 유심칩을 핸드폰에 갈아끼웠다. 그런데 내가 산 유심이 데이터 용량이 너무 적다며 아이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찾아본 것 중에서 가장 용량이 큰 걸로 샀는데 평소 자기가 쓰는 용량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다며 성질을 부렸다. 분명 후기에는 충분하다고 쓰여있었는데... 그럴거면 자기가 좀 알아보고 주문할 일이지, 나한테만 다 맡겨놓고는 뒤늦게 난리였다. 아니, 여행을 가면 세상구경을 해야지 왜 핸드폰만 하려고 하냐고! 여행을 시작도 하기전에 망치게 될까봐 용량이 부족하면 다시 사자고 살살 달래서 겨우 진정 시켰다.



예전부터 내 꿈은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서 배낭 대신에 캐리어를 끌고 왔지만, 이번 여행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패키지 여행이 아닌 하나부터 열까지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자유여행이다. 런던공항에 내리니 당장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생각보다 좁은 공항에 사람은 많고 복잡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역시 공항은 인천공항이 최고라는 걸 다시 확인하며 (한국)사람들이 가는대로 따라갔다.



무서운 얼굴의 입국심사원 앞에서 괜시리 주눅들던 예전과는 다르게 입국심사를 셀프로 간단하게 마치고 짐을 찾아 지하철에 올라탔다. 호텔까지는 중간에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야했다. 환승하는 역(페딩턴역)이 어찌나 복잡하던지, 그 복잡한 서울 지하철도 내집처럼 누비고 다니는 내가 두번이나 물어본 끝에 겨우 찾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잠시, 이런 젠장!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다.(어쩌면 우리가 못찾은 것일수도)


20키로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들고 난감해하고 있자 근사한 영국신사가 "캔 아이 헬프 유?"하는데, 그만 심쿵!! 젊고 예쁜 우리 딸을 제쳐두고 나를 헬프해주겠다니... 그런데 어디보자, 나이로 보나 인물로 보나 사윗감으로는 많이 아쉽고, 내 애인이라면 뭐...(자기야 미안) "땡큐~"를 백만번쯤은 한 것 같다. 캐리어에 햇반을 마구 쑤셔넣었을 때부터 이 사태를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그 콧대높은 영국에서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을 줄이야...



길고도 험란했던 여정 끝에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마치 2인용 고시원 같은 방을 보고 아이도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비록 비싸지 않은 호텔을 고르긴 했지만 사진은 제법 그럴싸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좀 더 쓸걸 그랬다. 에잇, 이왕 이렇게 된거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와서 호텔에서는 딱 잠만 자야겠다. 대신에 아낀 돈으로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지.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자려고 하는 아이를 꼬셔서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산책하고 과일을 몇개 사가지고 돌아왔다. 레인코트에 우산을 쓰고 걷는 신사(실제로는 한명도 못봤다)가 떠오르는 영국답게 첫날부터 비가 내렸다.



이렇게 난 지금 런던의 한 호텔방에 누워있다. 내가 워낙에 자는거 먹는거 싸는게 규칙적인 사람이라서 역시나 시차에 적응을 못하고 이렇게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지만, 이곳 런던에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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