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본격적으로 돌아볼 생각으로 아침 일찍 나섰다. 아이는 수능 시험에서 생활과 윤리를 선택했었다면서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몇몇 철학자의 이름을 읊어대며 아는 척을 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뭐라고 했는데?", "음... 좋은 말씀들을 하셨지!" 이런 시답지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구시가지 구경을 시작했다.
호텔 입구 건너편에 꽃집이 하나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꽃집이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아침에 꽃을 사가는 사람들이 많은 건 더 신기했다. 꽃보다 포장이 더 화려한 우리나라 꽃집들과는 다르게, 대부분 종이 한겹으로 소박하게 포장된 꽃다발들(한다발에 대략 5.99유로, 우리 돈 8500원 정도)인 걸 보면 다들 집안에 꽂아 놓으려고 사가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 한복판에서도 또 다른 꽃집을 발견했는데, 꽃을 가까이 하는 그들의 여유와 낭만이 부러웠다.
하이델베르크성으로 향하는 구시가지의 길이 참 멋있었다.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길은 마치 '여기는 독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듯 했다. 내가 생각했던 독일의 옛도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옅은 노란빛의 건물들 사이 길로 마차가 지나가면 2층 발코니에서 사람이 손 흔들며 인사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언젠가 영화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머리속으로 그려졌다.
걷다가 골목길 끝에 교회가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그동안 보았던 교회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예배당 뒷편에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종교가 없는데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싶어졌다.
갈가에 철학자인 듯한 동상이 서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길래 따라서 들어가 보았다. 대학의 과사무실 입구인 것 같은 분위기여서 왠지 들어오면 안되는 곳에 들어간 것 같아 얼른 나왔다.
다음으로는 하이델베르크 성령교회로 갔다. 예배당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아서 밖에서만 구경을 했다. 교회 전망대에 올라가면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볼 수 있다고 들었지만, 하이델베르크성에 올라갈 거라서 전망대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의 상징인 하이델베르크성을 찾아갔다. 그런데 푸니쿨라 타는 곳을 못찾아서 근처에서 한참을 헤맸다. 선생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인솔하는 학생 그룹을 따라가다 보니까 엉뚱한 곳이 나왔다. 구글맵에서는 분명 이 근처라는데 이 골목 저 골목을 아무리 돌아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우왕좌왕하며 헤매자 아이가 짜증을 냈다. 쳇, 저나 나나 여기가 처음인 건 마찬가진데 그럼 자기가 나서서 찾아보면 될 것을 신경질만 내고 있을 건 뭐람! 결국 아이가 지도를 다시 보더니 푸니쿨라 탑승장을 금방 찾아냈다. 분명히 좀전에 지나온 길이었는데 왜 못봤지? 할 말이 없었다.
푸니쿨라를 타고 하이델베르크성으로 올라갔다. 일단은 성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웅장했다. 돌로 두껍게 쌓아올린 거대한 성벽과 오래된 세월의 흔적들이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성 안에 약국박물관이 있어 잠시 둘러보았다. 한약방에 있는 것 같은 작은 약재서랍들과 약병들이 있었고 하나하나마다 약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봐도 뭐가 뭔지 모르니 그냥 대충 둘러보고 나왔는데, 밖에서 왠 남성 합창단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남성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성 안에 울려퍼지며 분위기를 한층 중후하게 만들었다.
지하에는 와인을 저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오크통이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 옆에 서니 내가 마치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는 와인을 마셔볼 수 있도록 판매도 하고 있었는데, 행여라도 낮술에 아이도 못알아보게 될까봐 꾹 참고 그냥 나왔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성의 하이라이트, 구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와~~". 성에서 내려다 보는 하이델베르크 시내 전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유럽에 왔음이 실감나는 주황색 지붕들과 그 옆으로 흐르는 강, 그리고 예쁜 다리까지 저절로 카메라를 들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누가 어떻게 찍어도 작품이 될 것 같은 멋진 풍경이라서 그런지 전문 사진작가들이 유독 많았다. 이런 배경이라면 얼마든지 딸내미의 찍사가 되어주리라... 찍고 또 찍었다.
성에서 내려와 하이델베르크 올드 브릿지를 건너 철학자의 길로 갔다. 그런데 철학자의 길로 들어서기까지가 고생길이었다. 거의 등산에 가까운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철학자의 길이 시작되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내내 힘들다고 잔뜩 부어있는 아이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걷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시작된 철학자의 길. 아래로 구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나도 철학자의 흉내를 내보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나',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여행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 뭐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내려왔다. 사색하기 좋은 곳이었고, 잠깐이었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렇게 많은 철학사상들이 생겨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철학자들도 이렇게 더운 날에는 집에서 쉬었을테지만 말이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아 구시가지에 있는 슈니첼 맛집을 찾아갔다. 돈까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것과 비슷한 슈니첼에 대해 별 기대를 안했는데 갈릭 슈니첼이 너무 맛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시원한 백주도 한잔 마셨다. 역시 독일은 맥주의 나라! 맥주와 돈까스, 아니 슈니첼은 진짜 환상의 짝꿍이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오는데 광장의 한 건물 앞에서 결혼식 피로연인 듯한 파티를 하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가 건물에서 나오며 축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객들은 환호를 하고, 분위기가 아주 흥겨웠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신랑 신부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부디 그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고친 학생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었다는 학생감옥으로 갔다. 감옥안에는 침대와 책상만 있었고 벽에는 학생들이 해놓은 낙서로 가득했다. 감옥이라고 해서 쇠창살이 쳐져있는 교도소 비슷한 곳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열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학생들은 감옥에 들어오는 걸 부끄러워 하기보다 낭만으로 생각했다나? 참 철딱서니가 없는건지, 아님 그것도 젊은이의 특권인건지...아무튼 젊음이 부럽다.
인터라켄에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 덥지 않았는데 하이델베르크는 너무 더웠다. 길에 다니는 젊은 여자들은 옷을 제대로 입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딸내미도 등판을 드러내는 원피스를 하나 사겠다고 해서 옷가게로 갔다. 엄마의 눈치가 보였는지 비교적 덜 야한 원피스를 하나 골랐다. 치마의 길이는 길지만 옆선이 허벅지까지 터져있고, 어깨는 잡아당기면 금방 풀려버릴 것 같은 얇은 끈으로 묶여있는 원피스였다. 그래, 그런 것도 젊어서나 입지, 입을 수 있을 때 실컷 입어라 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사줬다. 젊고 날씬하니 내가 봐도 예뻤다. 흥, 너는 좋겠다 젊고 예뻐서...
비록 하루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하이델베르크는 내가 그려왔던 것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독일어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와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뮌헨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드디어 뮌헨에 간다. 사실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뮌헨에 가는 것이었다. 남편의 유학을 따라가 3년을 살았던 곳을 22년만에 다시 가는 것이다. 어떻게 변했을지, 다시 보는 뮌헨에서 느끼는 감상은 어떨지, 설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