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중앙역에 내리는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2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두번은 변했을텐데도 예전에 살았던 곳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기분이 좋았다. 여기가 정말 뮌헨이야? 내가 진짜 다시 온거야? 뮌헨은 이제까지 다녀온 다른 도시들과는 그 느낌이 다르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22년전, 그러니까 30대의 나와 다시 만나는 여정이 될 것 같다.
뮌헨에서의 첫번째 일정은 예전에 살았던 기숙사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우리집 주소 Schwere-Reiter Straße35, Zimmer Nu.40! 숙소 근처에서 트램을 타고 갔다. 그런데 눈을 감아도 훤하게 그려지던 집으로 가는 길이 막상 근처에 오니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구글맵 길찾기에서는 두 정거장을 더 가야한다는데 큰애와 자주 가던 Nordbad(수영장)이 보여 얼른 내렸다. 수영장 길 건너편에 있던 맥도날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 휴일에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 맥도날드 뿐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집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자그마한 공터 옆에 있던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서 유모차에 매달고 기숙사까지 걸어다니던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생활비를 한푼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물건값이 싼 슈퍼를 두 세 군데씩 돌던 그때가 떠올랐다.
여기였나? 어, 이상하네. 분명 여기가 맞는데... 우리가 살던 기숙사 자리에는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기숙사 옆 공원도 그대로 있고, 길 건너편 주택들도 그대로인데 우리 기숙사만 없었다. 하기야 20년이 지났으니 안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던 곳이 없어져서 너무 서운했다.
다음은 큰애를 데리고 매일 가던 놀이터로 갔다. 남편이 학교에 가고나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버스를 타고 놀이터로 갔었다. 아이에게 브레첼을 사주던 버스 정류장 앞 빵집도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울에 비해 변화가 적은 뮌헨도 변하긴 변했다. 그나마 놀이터 앞 아이스크림 가게가 그대로 있어서 반가웠다. 아이스크림 값이 비싼 줄 알고 한동안 아이에게 사주지 못하다가 나중에 값을 제대로 알고나서부터는 놀이터에 갈때마다 한개씩 사줬었다. 다시 온 기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서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평소 문자에 답을 잘 안하는 남편도 반가운지 제깍제깍 반응을 보였다. 여기까지는 딸내미도 즐겁게 따라 다녔다. 하지만 그 당시 내 배속에 있던 딸내미는 모두 기억에 없는 곳들이니 추억에 젖어있는 엄마와 달리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점점 표정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큰애가 다녔던 유치원. 대학 캠퍼스 안에 있던 유치원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 유치원 안에서 아이들이 놀고있어서 마당에 들어가 둘러보았다. 교실 안으로도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안된다고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독일어를 못알아들어서 책 읽어주는 시간에 아이 혼자 마당에 나와서 자전거를 탔었는데... 여름이면 음식을 하나씩 해가지고 모여서 파티를 했었는데... 옛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남편의 유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아직 뮌헨에 살고 있다. 선배의 딸이랑 전와이프와 연락이 닿아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두번 본 적이 있어서 나는 만나는게 반가웠지만, 딸내미는 내키지 않아 했다. 엄마의 추억여행에 따라다니느라 이미 많이 지친데다가 낯선 사람들까지 만나야하니 짜증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부터 약속이 되어있던 것을 나혼자만 만날 수도 없어서 아이를 설득하여 겨우 함께 자리를 했다.
오전 내내 걸어다니고 점심시간도 늦어져서 많이 지치고 허기졌는데, 현지인들의 숨은 맛집으로 데리고 가줘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선배의 전와이프는 중국사람인데도 한국말을 어느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 주말마다 한글학교를 20년째 같이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나와 나이가 같아서 관심사도 비슷하고 할 말도 많았다. 아이들끼리도 동갑이라서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뮌헨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나서 혼자 시간을 보냈던 시립도서관에도 다시 가보고, 예전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던 학교 건물안으로도 들어가 보았다. 현지에서 공부한 사람이 안내하는대로 따라다니니 볼거리도 많고 듣는 얘기도 많아 재미있었다. 그런데 딸내미의 표정은 갈수록 안좋아졌다.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를 잘 나누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적당히 기회를 봐서 사람들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와 오늘 일에 대해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주고 밥도 사주고 구경도 시켜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되는 거 아니냐고, 외국에 살고 있는 또래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냐고, 중간에 아빠의 입장도 있는데 필요할 때는 불편한 걸 참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엄마에게는 뮌헨이 살았던 곳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뮌헨이 여행지인데 첫날부터 여행 기분을 낼 새도 없이 낯선 사람들과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게 싫었다고, 별로 할 얘기도 없는데 얘깃거리를 애써 찾아내야 하는 것도 피곤했고, 무엇보다 뮌헨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독일의 분위기를 먼저 느껴보고 싶었다고, 여행기간은 한정되어 있고 가보고 싶은 곳은 많은데 그냥 이렇게 하루를 흘려보내는게 속상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이가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아이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여행의 큰 재미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혼자 조용히 감상하는 걸 훨씬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나는 뮌헨에서는 지인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다. 이틀 뒤에도 또다른 지인과 약속이 되어있는데 그날은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내일은 잘츠부르크에 가기로 했었는데 아이에게 다시 의향을 물었다. 잘츠부르크에 가지않고 뮌헨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일상에서 보던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보는 아이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내가 잘 몰랐던 아이의 진짜 모습을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더불어 아이는 분명히 나와 다른 사람인데, 나는 여전히 엄마의 눈으로만 아이를 보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더 많이 참고 아이한테 일방적으로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이도 나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아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이번 여행으로 또 이렇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