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많은 곳을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뮌헨을 하나도 못본 것 같다는 딸내미를 위하여 오늘은 다시 여행자 모드 장착, 길을 나섰다. 오늘의 첫번째 목적지는 님펜부르크 궁전이었다. 바이에른 왕국의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별궁이었다는 님펜부르크 궁전은 트램을 타고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숙소를 시내의 한복판인 중앙역 근처로 잡았더니 어디를 가나 멀지 않아서 좋다.
님펜부르크 궁전은 내가 뮌헨에서 살 때 친정부모님이 오셔서 엄마와 함께 다녀왔던 곳이다. 그때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는 집에서 쉬시게 하고 엄마와 둘이서만 갔었다. 엄마와 둘이서 갔던 곳을 23년만에 딸과 둘이서 다시 갔다.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싶었다. 기분이 묘했다.
궁전 앞에는 큰 호수와 잘 정돈된 정원이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궁전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베르샤유 궁전과 비교한다면 궁전이 맞나 싶을만큼 외관이 소박했다. 하지만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궁전 내부는 들어서자마자 입이 떡 벌어질만큼 화려했다.
커다란 상들리에와 벽면의 장식들, 그리고 창문의 모양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까지 모두 너무나 화려하고 예뻤다. 그중에서도 천장의 그림이 유명하다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그 세밀하고 화려함에 한참을 올려다 보았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고대 이탈리아의 꽃의 여신과 요정들을 그린 것이고, 궁전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인테리어 양식으로 꾸며진 방들은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방 전체에 여성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방이 흥미로웠는데, 일명 '미인의 방'이라고 불리는 이 방은 루드비히 1세가 미모가 뛰어나다고 하는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걸어놓았다고 한다. 딸내미랑 서로 제일 예쁜 여자를 골라봤는데 세대차이인지, 취향의 차이인지 확실히 의견이 달랐다.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제일 좋았던 곳은 궁전 뒤편의 정원이었다. 베르샤유 궁전에서도 궁전 내부보다 정원이 더 좋았는데 그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정원의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아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한 것도 야박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어젯밤 아이와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서먹해진 분위기 때문에 정원에서는 거리를 두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걷는 걸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숲길을 보면 저절로 발길이 향한다. 님펜부르크 궁전의 정원에도 걷기 좋은 숲길이 있었다. 친정 엄마와 함께 왔을 때는 못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숲길을 한참동안 걸었다. 30대 이곳에 있었던 나와 50대인 지금의 나... '참 잘 살았다. 애썼다!' 내 마음속의 소리가 들렸다. 울컥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나를 찾지 않았다. 아이도 혼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정원을 크게 돌아 궁전입구로 돌아오니 아이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정원의 다른 출구로 나왔는데 ALDI 슈퍼마켓이 보였다.
예전에 뮌헨에서는 같은 상품도 슈퍼마켓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ALDI가 제일 싼 슈퍼였다고 말하니 아이가 들어가 보자고 했다. 그때부터 아이에게 지름신이 내렸다. 한국에도 있는 초콜렛과 젤리의 가격을 보더니 장바구니 가득 마구 쓸어담았다. 어제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게 힘들었다더니 이곳에서 사갈 것들을 얘기해 주는 건 귀담아 들었던지 상표를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골랐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 숙소에 잠시 들렀다가 호프브로이로 갔다. 어지간해서는 낮술은 안하려고 하지만, 낮이고 밤이고 심지어 아침에도 맥주를 물 마시듯 하는 독일 사람들을 보니 나도 낮술이 땡겼다. 맥주와 소세지의 나라에 왔으니 당연히 호프브로이를 빼놓을 수 없었다.
호프브로이에 들어서자 사람들도 많고 밴드의 음악소리도 커서 흥이 났다. 길다란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과 합석을 했다. 알코올의 힘인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술잔을 들고 눈으로 건배를 했다. 독일식 정통 소세지인 바이스부어스트와 구운 닭고기, 감자를 주문했다. 물론 바이에른 지방의 정통 맥주인 바이스비어도 같이 주문했다. 너무 맛있었다. 맛으로 먹고 분위기로 먹고, 술을 거의 먹지 않는 딸내미도 한잔을 거의 다 비웠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자 기분이 좋아지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취한 것 같다며 흐느적 거리는 딸내미를 붙잡고 마리엔 광장으로 갔다. 마리엔 광장의 멋진 시청사 건물을 구경하고, 시계탑 위의 인형을 보느라 모두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걸어다녔다. 광장의 한편에 있는 교회에도 무작정 들어가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Hallo~"도 하고, 낮술에 객기를 부려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딸내미도 어제와 다르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마리엔 광장에서 숙소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작은 공원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뮌헨의 일정을 너무 길게 잡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시간여유가 많으니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더 좋다. 이번 여행의 마무리를 뮌헨에서 하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이제 여행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는게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