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한국으로 떠나야 하니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뮌헨에서의 일정을 5박6일로 다소 길게 잡은 이유는 그중의 하루나 이틀은 잘츠부르크와 퓌센 같은 근처의 가까운 도시를 당일치기로 갔다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뮌헨에서의 첫날에 아이와 갈등이 있었고, 나는 이미 몇번 가본 곳이라서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다시 갈 필요가 없었다. 계획과 다르게 뮌헨에서의 일정에 여유가 많아져서 몸도 마음도 제대로 휴식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좋다.
오늘은 오전에 레지텐츠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영국 정원을 거닐며 여행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또, 저녁에는 남편 선배와 그의 아이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레지덴츠 박물관은 지나다니며 건물만 보았지 나도 들어가 보지는 않은 곳이었다.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는데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이틀 전에 다녀온 님펜부르크 궁전이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별궁이었다면 레지덴츠 궁전은 그 가문의 본궁이다. 레지덴츠 궁전에서는 박물관, 보물관, 레지덴츠 극장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박물관만 관람했다.
궁전의 외관은 님펜부르크 궁전이 그랬던 것 처럼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본궁답게 님펜부르크 궁전보다 훨씬 넓고 화려했다. 벽면과 천장이 온통 금으로 장식된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초입에 헉! 여기는 뭐지? 싶은,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대형 홀이 나왔다. 안티쿠아리움이라고 하는 이곳에는 고대 조각품들이 줄지어 놓여있었는데, 공간의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되어 정작 조각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 분위기가 다른 방들을 하나씩 볼 수 있었는데, 방이 너무 많아서 이 곳에 살았던 왕족들이 혹시 방을 찾느라 길을 잃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너무 넓고 복잡했다. 어떤 방은 그린색으로, 어떤 방은 붉은 색으로, 또 어떤 방은 온통 거울로 장식되어 있어 방마다 개성이 넘쳤다. 돌아보면서 눈에 띄는 방들만 사진을 찍었는데, 볼거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사진을 거의 안찍는 나도 찍은 사진이 60장이나 되었다.
방들을 모두 구경하고 윗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당시 궁전에서 사용되었던 그릇들과 물 건너 들어온 것 같은 갖가지 장식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풀 세트로 갖춰져있는 그릇들은 TV 드라마속 부잣집의 저녁 식탁에 놓여있는 것들과 비슷해 보였고, 지금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만큼 고급지고 화려한 것들이었다.
레지덴츠 박물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려한 것 옆에 더 화려한 것', 그야말로 화려함의 끝판왕이었다. 검소한 이미지의 독일에 이토록 화려한 곳이 있었다니 참 신기하고 놀라웠다.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박물관만 대충 돌아보는데도 거의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우연히 발견한 쌀국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영국 정원으로 갔다. 아니 그 전에, 초콜릿과 곰젤리를 그렇게 많이 사고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딸내미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ALDI를 가서 2차 폭풍 쇼핑을 했다. 혹시 학교 때려치우고 젤리 장사로 나서려는 건 아닌지 몹시 걱정스러웠다.
영국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젊은이들이 도심 한복판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어제는 산책하면서 강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바로 그 강의 급류지점에서 빠른 유속을 이용해 서핑을 하고 있었다. 도심에서 서핑이라니 더운 날씨에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아주 재미난 볼거리였다.
사람들이 수영과 서핑을 즐기는 이 강은 영국 정원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물줄기 옆으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모여앉아 일광욕을 즐기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공놀이를 하기도 하며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영국정원에서 피크닉을 하려고 한국에서 돗자리까지 챙겨왔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안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아쉬운대로 점퍼를 깔고 잔디밭에 앉았다. 얼마만에 가져보는 여유인지, 돗자리만 있었으면 드러누워서 한숨 자고 싶었다. 영국 정원은 워낙 넓어서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천천히 발길 닫는대로 공원을 걷다가 중국 탑 옆의 비어가르텐으로 갔다.
뮌헨에 와서 비어가르텐은 두번째 오는 것이었지만, 첫번째는 제대로 즐기지를 못했어서 남편 선배와의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독일에서 제일 부러운 문화가 바로 이 비어가르텐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다. 맥주를 어디에서 마시나 다 똑같은 맥주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넓은 야외 공원에서 마시는 맥주는 그 맛이 다르다.
이곳에서 친하게 지냈던 예전의 모습만 생각하다가 오랜만에 만나니 선배도 많이 늙어있었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선배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또 한번 세월이 느껴졌다. 선배의 아이도 며칠만에 다시 만나니 더 반가웠다. 서울 소식과 뮌헨의 소식을 서로 전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선배의 전와이프가 왔다. 이혼한 부부의 재회라니... 나는 왠지 당황스럽고 어색한데, 정작 그들은 자연스러웠다. 내가 너무 촌스러운가? 한편으로는 서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그들의 쿨한 관계가 부럽기도 했다.
선배의 전와이프까지 만날거라고 예상을 못해 서울에서 선배와 아이 선물만 준비했는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혹시나 싶어 런던에서 내가 먹으려고 샀었던 갱년기 영양제를 가지고 나가서 세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줄 수 있었다.
밤이 되어서 아쉽게 비어가르텐을 떠나 대학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잠을 못잘까봐 밤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뮌헨의 밤 분위기에 취해 카푸치노를 한잔 마셨다. 두번째 만남이라서 그런지 오늘은 딸내미도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선배 와이프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비슷한 시기에 생각지도 않은 임신으로 서로 심란해했던 시절 얘기부터 그동안 혼자서 아이를 키워온 이야기이며,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들까지, 꺼내놓기 힘든 속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뮌헨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라서 혹시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내일 아침에는 모두 출근을 해서 또 하루를 바쁘게 살아야 할텐데, 우리 떄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게 하는게 미안했다. 그래서 마음같아서는 뮌헨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곳까지 따라와서 배웅을 해주는 친구와 아이가 너무나 고마워 꼭 안아주었다. 이들과의 시간이 너무 따뜻했고 너무 감사했다. 부디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러고보면 뮌헨에서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받고 떠나는 것 같다.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뮌헨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쉽게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