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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Aug 04. 2024

에필로그

여행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오늘 저녁은 뭐 해먹지?



부엌 창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후끈하다. 싱크대까지 들어오는 햇볕 때문에 아무래도 썬캡을 쓰고 저녁을 해야할 것 같다. 나(=밥)를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마음은 아직도 유럽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여행을 하는동안 매일매일 여행기를 썼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날아가버리는 기억들을 꽁꽁 묶어두기 위해 쓰기 시작한 여행기가 여행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는 시간이 나질 않아 밀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밀린 여행기를 마저 쓰느라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알프스산에 둘러쌓여 행복해 하고 있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고단한 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고, 뮌헨의 비어가르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에펠탑은 밤에 불이 켜지면 훨씬 더 예쁜데"

"저기 개선문 앞에는 횡단보도가 없다니깐"



게다가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나오는 파리의 곳곳을 볼 때마다 자꾸만 여행의 기억들이 떠올라 나는 지금도 런던의, 파리의, 인터라켄의, 하이델베르크의, 뮌헨의 어느 거리를 거닐고 있는 기분이다. 유럽 물이 빠지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았다. 뒤늦게 찾아온 갱년기 우울감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전날까지도 전혀 흥이 나지 않았었다. 긴 여행에 체력이 버텨줄 지, 계획대로 잘 찾아다닐 수 있을지, 딸내미와는 싸우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을지... 신나고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보다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를 더 많이 했었다.



여행을 끝마치고 난 지금의 소감은? '안갔으면 어쩔뻔 했어!' 너무 뿌듯하고 너무 행복한 여행이었다. 30년 넘게 꿈꾸어 왔던, 내가 계획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유럽(배낭)여행이 나에게 얼마나 큰 꿈이었는지를 분명히 깨달은 여행이었다. 매 순간이 벅차오르고 매 순간이 행복했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내 안이 충분히 채워져 더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사람'이었다. 가 보고 싶었던 곳이나 아름답고 멋있었던 곳은 내 머리속에 남았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행복했던 시간은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새겨졌다. 무거운 캐리어를 기꺼이 들어주었던 신사들,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친절하게 도와 주었던 사람들, 낯설고 서러운 마음을 아코디언 연주로 달래주었던 지하철 안의 늙은 악사, 아파서 힘들어 하는 아이의 안부를 걱정스럽게 물어봐주던 사람들처럼 잠깐 스쳐가는 인연들에게서 받은 감동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있다. 한번 보고 말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나를 영원히 그 한 번의 모습으로만 기억할테니까.



딸내미는 유럽에서 사온 초콜렛과 젤리를 챙겨서 벌써 세번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유로스타를 기다릴 때 옆에 앉아서 추근대던 느끼한 홍콩남자 얘기며, 뮌헨에서 "뷰티풀 걸~"이라고 하며 SNS 계정을 받아갔다는 잘 생긴 터키남자 얘기를 하고 있겠지? 아빠에게도 인터라켄에서 했던 패러글라이딩 체험담을 신나게 늘어놓는 걸 보면 힘들 때마다 엄마에게 심술부렸던 기억은 벌써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남편을 많이 닮은 딸내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내가 남편을 왜 힘들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남편과 잘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남편의 행복까지 내가 책임지려고 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은 일요일 아침 10시 30분, 그렇다면 뮌헨은 새벽 3시 30분, 친구들은 여유로운 주말 저녁을 보내고, 느즈막히 잠자리에 들어 지금쯤 단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편안한 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22년동안 변함없이 무탈하게 지내온 그들이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나도 그들에게 특별하지 않은 나의 일상을 계속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한 주동안 매일 출근을 했다. 여행 경비를 벌고 있다고 생각하니 별로 힘들지 않았다. 식구들 밥도 열심히 챙겼다. 행복했던 여행으로 에너지가 가득차니 그것도 할 만했다. 갱년기 우울감? 그게 뭔데? 나는 이번 여행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다. 부디 그 효과가 아주 오래 갔으면 좋겠다. 아니, 그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다음 꿈을 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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