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모습에서 옅은 무지개가 보였다 II

by 서정희

인터뷰를 끝낸 며칠 뒤, 우진님 사무실에서부터 함께 버스를 타고 그가 좋아하는 장소(무수골 쌍둥이 전망대)로 향했다. 차가운 물과 얄궂은 주전부리도 준비했다.

서있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함께 산길을 걸었고, 무수골 쌍둥이 전망대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평소에 이곳, 이 시간에 즐겨 듣는 음악도 함께 들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쉬웠는지, 괜히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무수골 초입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 좀 어떠셨어요?

정말 재밌었습니다. TV 토크쇼에 나온 느낌?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생각보다 제가 말하는 걸 좋아하고, 관종이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진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말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좋아하는 거, 제가 좋아하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우진님은 평소에 뛰는 거 말고 뭘 좋아하세요?

혼자 망상에 빠지는 걸 좋아해요. 사색은 아닌데, 무언가를 느끼는 걸 좋아하죠.

가끔 노을이 굉장히 붉은 날이 있어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장 아래쪽은 빨간색, 위로 가면 갈수록 노랑, 초록, 보라, 진한 남색으로 보이다가 갑자기 무지개 색으로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노을 속엔 무지개가 있구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바람 소리를 자세히 들으면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파도치는 바닷소리 같이 들리기도 해요.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죠.

예전에 더운 봄날, 그날따라 연구실이 너무 가기 싫은 거예요.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클림트의 ‘키스’라는 작품 설명을 하면서 피아노 연주곡 ‘더 키스’라는 곡을 들려줬어요. 작품 설명과 그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봄이 느껴지면서 우울했던 감정이 행복감으로 바뀌었어요.

‘이런 게 소소한 행복이구나, 참 행복 별거 없구나.’



미래의 청사진이 그려져 있나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날의 그의 모습에서 옅은 무지개가 보였고, 스치는 파도 소리와 함께 봄 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보기보다 꽤 감성적이고 진지한 구석이 있다.

술에 취해 쏟아냈던 나의 개똥철학과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황당한 고백들, 답이 없던 미래에 대한 고민과 감상에 젖은 모호한 대화들. 그때는 나를 표현하는 내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와의 많은 대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가 근사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주 갔던 무수골인데, 노을이 내려앉은 무수골의 하늘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해가 뜨는 풍경을 좋아하세요? 해가 지는 풍경을 좋아하세요?”


그의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의 뜨는 해를 직면하는 것이 두렵고, 오늘의 해가 지는 것은 아쉽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야 열심히 사는 것인지, 아직도 어렵고 헷갈린다. 2013년 봄 길었던 방황의 끝자락쯤, 너무나도 존경하는 나의 은사님께서 무심하게 던지셨던 몇 마디 말씀에 지금에 내가 있게 되었다.


“정희야, 나를 서울에 있는 삼촌쯤으로 생각하는 건 어떠니?”

“너는 어떤 일이 되었든 표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요즘에서야 조금씩 이해가 된다.

20대의 나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때 나에게 필요했던 최선의 위안의 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도예를 전공하게 되었고,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고민하고 작업했다. 내가 가진 재능에 비해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내 작업을 좋아해 주는 이들도 생겼다. 그 당시엔 교수님의 말씀들을 붙잡고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는 노을을 보니 지금 내 모습 같았다.

다 소진된 작업을 붙들고 몇 년을 힘들어했다. 성숙하고 아름답게 남은 미련을 깨끗이 털어버려야 한다. 나는 그동안 미련함을 근성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스스로에게 세뇌시켜 왔다.

지는 해를 등지고 집까지 한참을 걸었다. 우진님이 추천해 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시원하고 청량한 맛이었다.





'낮에 만난 사람들' 인터뷰는 2021년도에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