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억에게 I

by 서정희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입시가 끝날 때까지 울산 변두리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두 개,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 그나마 초등학교도 내가 고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가 더 생겼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고등학교까지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온 지 15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향수병을 앓곤 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10년 동안 용산에 정 붙이고 살았다. 워낙 집순이라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자주 가던 단골 카페와 편의점, 밥집과 술집들(심지어 학교 앞 투다리에는 내가 만든 전용 도자기 잔을 놓고 다녔다.) 공방을 오픈하려 월세가 저렴한 지역을 찾고 찾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인생이 한 단계 하락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많이 적응했지만, 4~5년 전만 하더라도 ‘여기가 서울의 할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고 무서웠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점점 이 동네에 정을 붙이고 애정을 갖게 되었다.


공방 10분 거리에는 북한산 둘레길이 있었고, 시원하게 솟아있는 도봉산과 잔잔하게 흐르는 방학천이 있었다. 헬스장 관장님 부부와 친해져서 자주 왕래도 하고 주변 좋은 분들도 소개를 받게 되었다. 내 이름이 들어간 지원사업도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이곳에 살게 될 줄 생각도 못했다. 조금씩 내가 사는 동네에 적응하고 마음에 담게 되었지만, 해소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익숙함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외로움과 고립감이 더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고 어느 정도 체념하고 지냈을 무렵, 대학교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언니가 도봉구에 공방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언니와는 꽤 깊었던 사이였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주던 사이였다.

학교생활에 애착이 없던 내가 언니 덕분에 실기실 가는 걸 즐거워하게 되었고, 동기가 없어 움츠렸던 언니는 나로 인해 실기실 1인자가 되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10년의 공백이 너무 컸던 걸까?

언니에게 선뜻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면 어쩌지? 나만큼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걱정에 연락도 못하고 마음 한 구석이 항상 무거웠다.

올해 초, 바람이 엄청나게 불고 발가락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날. 갑자기 언니 공방에 찾아갔다.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공방에는 있기 싫고, 갈 데는 없고, 집에는 더더욱 가기 싫고 만날 사람은 없고... 딱 그런 날이었다. 공방 문은 닫혀있었고 설상가상 언니 번호는 바뀌어있었다. 공방 이름을 검색해서 언니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30분쯤 후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어디 갔어! 왜 공방에 없어?”

“정희야, 미안해. 수업 중이었어.”


다행히 혜인언니는 단번에 나라는 걸 알아차렸고 어린애 달래듯이 나를 달래주었다.

10년의 공백?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짧은 통화 속에 우리는 서로 보고 싶었던 마음을 확인했고, 곧 보자는 약속을 하며 통화를 마쳤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함께 전시를 하게 되었고, 이렇게 인터뷰 명목으로 그동안 재워뒀던 얘기들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자며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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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언니에게


혜인언니!

평소에 술술 나오던 말들이 왜 이렇게 쓰기가 어려운지...

내가 언니에 대해 꽤 많은 생각과 많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나 봐. 생각과 감정 덩어리들이 얽히고 뭉쳐서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될지 모르겠어. 짧지 않았던 지난 10년의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인지, 언니한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꺼내기 쉽지가 않은 것 같아.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아주 잘 지냈어.


학교 졸업하고 방황도 해보고, 회사도 잠깐 다녀보고, 결국 학교로 다시 돌아가긴 했지만 자잘하게 많은 일들과 큰 변화들이 있었어.

일단 언니를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뻐!

진짜 딱 10년 만이네. 대학교 다닐 때 언니랑 술 마시고 울고 웃고 비틀거리면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만나서 안부를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 나이가 되었네.

나는 사실 공방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과 멀어지게 되었어. 다들 살기 바빠서인지, 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인지, 아니면 내가 예전만큼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인지.

언니가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것도 알고 있었고, 도봉구로 이사 온 것도 알고 있었는데 선뜻 연락하기가 어려웠어. 언니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해.


나 진짜 너무 반가웠고 울컥하기도 했어.

오랜만에 고향친구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도 드디어 일 끝나고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생겼구나! 작품 회의 끝나고 술 마셨던 날, 나한테 털어놨던 얘기들을 듣고 그동안의 힘듦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속상하네. 왜인지 모르겠는데 10년 전에도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했는데, 여전히 마음이 뭉클해. 언니가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항상 남들을 먼저 챙기고 배려하는 모습도 좋지만, 언니 스스로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고!


언니의 소중한 마음 내주어서 고마워.

이렇게 흐지부지 또 10년의 시간이 또 흐르고 40대의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우리 반갑게 눈 마주치고 서로 안아주자.


나랑 친구 해줘서 고마워!






'낮에 만난 사람들' 인터뷰는 2021년도에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