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 중2병이 심했을 때 패닉 음악을 들으며 뾰족한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요즘에도 예전 패닉의 음악은 나에게 덤덤한 위로를 주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차려주는 존재이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마음이 잘 변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 편이다. 10대 때부터 나의 불변의 이상형은 패닉의 이적님이었다. 적극적인 성격이 아닌지라 그저 앨범이 나오면 CD를 구매하고 하루종일 그 노래를 듣고, 이적님이 운영하던 홈페이지에 올라오던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마음속 드글드글 끓는 마음을 위트 있지만 과하지 않게 풀어내는 그 방식도 멋있었고, 순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거침없이 뱉어내는 표현들이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성으로서도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의 이상형은 줄 곧 '이적 같은 남자'였다.
물론 지금은 이적님보다 더 멋있고 한없이 다정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 새로운 이상형을 보게 되었다.
도봉구 벚꽃 축제에 노브레인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0년대 펑크 키드였던 남편은 축제 장소 인근 맛집과 카페를 알아볼 정도로(원래 남편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신이 났고, 새로 산 옷도 입었더랬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배도 채우고 맛있는 커피도 한잔 때리고 공연하는 장소로 갔다. 운 좋게 리허설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사실 펑크 밴드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보고 들으니 묘한 희열이 느껴질 정도로 공연에 푹 빠져버렸다. 공연 자체도 너무 좋았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건 보컬님의 에티튜드였다.
리허설 때도 멀끔한 옷을 입고 스텝분들, 그를 반겨주는 팬분들께도 굉장히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주셨다. 본 공연 때는 뭐 당연히 멋있었고, 끝나고 기다렸다 사진을 찍었는데... 세상에, 너무 멋있어 보이더라고!
집에 와서 남편과 닭발에 소맥을 먹으면서 같이 찍은 사진을 자랑하고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그냥, 요즘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난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았고,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보컬님께서 가죽쟈켓을 입고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 자체가 나에게는 큰 응원이었다. 그는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의 마음을 밝혀줬고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어줬다. 한 사람 인생에 침투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멋진 일인가!
작업을 관둔 이후로, 나 스스로 나를 틀 안에 가두었던 것 같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 나이가 많지 않을까? 난 이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없지 않을까? 난 그저 누군가의 아내일 뿐인가? 내가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올해 나에게 좋은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는 더 많은 이상형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