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딱 한 방울
서로에게 힘이되는 충분한 양.
#11. 딱 한 방울
그놈과의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공기의 흐름이 바뀔 것 같아 숨을 참았다. 끈끈이가 나을지 전기충격기가 나을지 생각해본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까 생각을 멈췄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은 그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 이번에도 공격보단 수비 쪽을 택한다.
제주 살이. 단독주택. 잔디마당. 나의 모든 로망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지네다. 불자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살생을 금기하는 삶을 살던 내게 이곳은 벗어날 수 없는 번뇌의 장이였다.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꿔 나타나는 벌레들의 향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움츠리게 됐는데 이는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곤충백과에 나오는 사진이 정말 실제 사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들의 존재감에 나는 늘 머리털이 쭈뼛섰다. 그놈들은 천장과 바닥, 벽을 가리지 않고 출몰했으며 사람을 공격하는 기능도 탑재했다. 그놈을 마주치는 곳이 우리 집 ‘안’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살생의 정당성을 쥐어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에 맞서 공격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정당방위였다. 늘 몸이 얼어 아무것도 하지못한 채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곤 했지만.
제주에서의 3번째 단독 주택에 살고 있다. 이사를 도와주신 제주 토박이 삼촌은 이사가 끝날 때마다 “돈 많이 벌어서 다음엔 자기 집으로 이사 갈 때 불러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셨다. 들을 때마다 나쁘지 않은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다. 최근 세 번째 이사를 끝낸 후 삼촌은 ‘아이고 이번 집은 지네 없겠다. 진짜야 내가 보증해.’ 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다. 이보다 더 좋은 인사는 없었다. 나는 제주토박이 삼촌의 눈에 보이지않는 보증서를 감싸안고 기뻐했다. 그리고 이내, 드디어 그놈들로부터 도망쳤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하, 그래. 이제 됐다.
텃밭의 땅을 매며 수많은 애기 지네들을 발견했지만, 약재로 쓰일 법한 손보다 큰 지네의 시체를 해마다 60마리씩 치워야했던 내게 이것들은 귀여움에 불과했다. 새롭게 등장한 복병은 지렁이였다. 흙을 한 삽 풀 때마다 뱀처럼 큰 지렁이가 갑자기 파닥파닥 거리며 삽 위로 튀어올라 몸을 비틀어대면 잊고 있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지렁이는 사람을 공격하지도 않고, 여기는 우리 집 실내도 아니고, 엄연히 따지자면 이 곳은 그들의 집이었다. 오히려 지렁이는 돌밭이던 우리 집 텃밭에서 발견한 희망에 가까웠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살생의 정당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눈을 질끈 감고 꿈들대는 녀석에서 흙을 덮어주는 수밖에. 지렁이 덕이었을까. 텃밭에 심었던 작물들은 하룻밤 새 쑥쑥 자라 있었다.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궁금해 카메라를 켜 두고 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많이 자라 줄기와 순을 쳐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쑥쑥 자라라고 물을 줄땐 언제고 이젠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멀쩡한 순을 잘라내야하는 모순에 마음이 아플 정도로 나는 우리집 작물들과 사랑에 빠졌다. 아이들이 고사리 손을 보탰다. 쌈 채소의 잎들을 따주고 고춧잎들을 정리하고, 오이순도 정리하고 , 마른 대파 잎을 손질하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엄마!!!!!!!!”
다급한 아이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검은색 깨가 다다다다닥 붙어있는 대파가 있었다. 일주일 동안 성장이 멈춘듯했던 대파의 안쪽에 총채벌레가 살림을 차린 후였다. ‘어머 얼마나 무서웠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벌레 떼 사이에서 꼼짝없이 오들오들 떨었을 대파들이 마치 벌레와 대치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대파에겐 내가 가진 전기채도 끈끈이 테이프도 없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농약사로 달려갔다. 너무 깨알 같아서 검지와 중지로 5배를 확대한 사진을 내밀며 대파의 아픔을 알렸다. 사장님은 사진을 힐긋 보시더니 ‘텃밭이면 그냥 떼고 드세요’라며 농약구입을 만류하셨다. 약을 구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는 해충을 박멸할 약도 없고 , 진드기를 툭툭 털어줄 대범함도 없었다.
급하게 인터넷에서 살충제를 검색해 주문했다. 주문한 살충제가 제주에 도착하기까지 4일의 시간 동안 대파는 점점 시들어갔다. 기다렸던 택배가 오자마자 박스를 뜯었는데 , 식용식물에는 살포할 수 없는 살충제였다. 농약은 농약사에서만 구입해야 하는데 , 농약사에서는 내게 농약을 팔지않았다. 방법은 하나뿐. 나는 극성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시 농약사를 찾아갔다. 이번엔 사진을 내밀지 않았다. 지난 2주동안 성장을 멈추고 시름시름 아파나는 대파 10대와 상추 5대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떠들었다. 이번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밭농사에 쓰이는 대용량의 농약을 판매하는 곳에서 여러 농약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시던 사장님은 진열된 것 중 가장 작은 180ml의 농약을 한 병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한 방울만 넣어 뿌려요. 딱 한 방울만.’
집에 돌아와 용량표를 보며 계산해보니 사장님의 말씀대로 500ml 분무기에 정말 딱 한 방울이었다. 파인애플 분무기에 한 방울의 농약을 녹인후 분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진드기 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자라기 시작한 대파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으쓱해지기까지 했다.
너에게 내가 필요하고, 나에겐 네가 필요한 순간은 딱 한방울이면 충분했다.
딱 , 한 방울.
엄마를 위한 부록 2.
3월 파종 작물_ 대파 북주기
대파 북주기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대파를 심어요.
제가 사는 제주는 따듯해서 3월 초에 씨앗을 뿌립니다. (중부는 3월 말 4월 초 파종)
세 달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라고, 뿌리만 남긴 채 초록 부분만 잘라먹으면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초록이가 자랍니다. 즉 먹고 싶을 때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만 100% 각종 진드기가 꼬이는 작물이라 농약 없이 키우기가 힘들어요.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하얀 부분이 높고 굵은 대파를 얻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 번 뿌리에 흙을 덮어주는 “북주기”를 해야 합니다. 흙 위로 하얀 대가 조금 올라왔다 싶으면 두꺼비집 짓듯이 대파의 양 옆으로 흙을 채워주세요. 흰 대가 높아지고 높게 자라는 작물이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해줍니다. 역시 굉장히 귀찮은 작업이라 여름이 오기 전에 다 뽑아 먹을 정도만 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