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텃밭로망스
그것은 로망(ROMAN)이었다.
#1. 그것은 로망이었다.
'말도 안돼!!
이 그림 같은 잔디마당의 2층 단독 주택을 우리 가족만 사용한다고요?! '
서울에서 마당 딸린 집을 구하러 다닌 지 꼬박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주택이란, 마당은 있지만 잔디는 없는 곳이거나 마당이라기 보단 ‘대문 길목’ 같은 표현이 어울리는 작은 통로를 가진 집이 전부였다. 서서히 잔디마당의 로망에 대한 끈을 놓으려 할 즈음 우연히 보게 된 제주의 리얼 잔디마당이 딸린 단독주택 매물! 이 사진 한 장으로 홀린 듯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달 만에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한 채 제주로 내려왔다.
잔디마당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무작정 제주로 내려온 지 5년이 지났다. 초록의 잔디마당에서의 4년은 그야말로 잡초와의 전쟁.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요. 잔디는 잡초라는 것을. 먹지도 못하는 이 잡풀에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 건가. 게다가 나는 고구마에도 김치를 싸 먹는 토종 한국인이라 죽어도 맨발로 잔디를 걷거나 잔디에 드러누워 느긋하게 하늘을 감상하는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나의 로망이었던 잔디는 물을 주지 않아도 발목을 덮을 정도로 자라나 일주일에 한 번 밀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는 잡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이따금씩 시멘트를 개어다 자라나는 잔디에 붓고 싶은 잔인한 충동을 잠재운 것은 잔디 사이를 비집고 자라는 쑥이었다. 쑥은 진한 향에서부터 잔디 따위와는 다른 존재감을 뿜어댔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씨앗은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라나는 기특함까지 갖추었다. 몇 번을 먹어도 다시 자라나는 덕에 우리는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한 계절 내내 쑥전을 먹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을 지날 때면 잔디 틈바구니 속에서 자라고 있을 쑥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 이거지! 먹을 수 있는 걸 키워야지! 자그마한 텃밭이 있으면 좋겠다. 다음에 집을 구한다면 무조건 텃밭 텃밭 텃밭이 있는 곳으로!
텃밭이 있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프릴 달린 우아한 앞치마를 하고 식사 직전에 텃밭에 나가 빠득빠득 씻을 필요도 없는 싱싱한 채소를 먹을 만큼 뜯어와 휘리릭 물에 흔든 후 샐러드를 먹는 상상. 신선한 제철 채소라니 , 채소 값이 금값인 요즘 이 얼마나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고상한 활동인가!
텃밭이 있는 마당을 보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집에 계약금을 넣었다. 그것은 잔디 마당만 보고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를 올 때보다 빠른 속도였다. 40년이 넘은 제주의 구옥. 우리는 텃밭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빗물을 통과하는 썩은 나무 창이 빙 둘러진 이 로망 속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