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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Jul 24. 2024

처음으로 찾아온 불안장애

혼자 있는 집에서 호흡곤란이 왔다.








파리에서 혼자 산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인생 처음으로 호흡곤란을 겪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좀 힘든 날이긴 했다. 아침 일찍 아뜰리에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퇴근과 동시에 파리 동역 쪽에 있는 니트 학교에 기계 니트 수업을 들으러 간 첫날이었다. 이 날은 바빠서 점심도 간단히 먹고, 시간이 없어 저녁은 먹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탔다. 파리 동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간 건 이 날이 처음이었는데, 바스티유에서 올라갈수록 정말 신기하게도 흑인들만 지하철에 남았다.


지하철 출구로 나오니 아프리카의 어느 가난한 동네에 온 것 같았다. 살면서 그렇게 검게 물든 바나나가 쌓여있는 슈퍼 매대는 처음 봤다. 바나나 시든 냄새가 훅 올라왔고 옆에 있는 과일들도 거뭇거뭇했다. 아뜰리에가 있는 마레 쪽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도 오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졌다. 길에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흑인 미용실, 옷가게부터 옛날 전자기기 가게들이 보였다. 아시안은 나밖에 안 보였다.


지하철 출구에서 니트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인데 나는 왜 이렇게 안전하지 못한 기분을 느끼는 건지.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나는 신경 써주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혼자인 파리에서 더더욱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니트학교에 도착했고 학교라고 하기에는 정말 작은 공간이어서 다시 한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 수업을 들으러 온 사람은 나와 프랑스인 아주머니 한 분이었고 선생님과 셋이 테이블에 앉아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니팅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긴장이 풀렸다. 아뜰리에에서 매일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해야 하는 일만 하다가 오랜만에 원하는 컬러와 소재의 실을 고르고 새로운 창작 방법을 배우니 조금 설레고 신이 났다.


밤이 어두워져서야 수업이 끝났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배가 고파서 집 앞에 가장 늦은 시간까지 열려있는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과 야채찜, 고기요리를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리고 음식을 몇 번 집어먹을 때쯤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경험은 이때 처음 겪어보았다. 너무 놀라서 심장도 두근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보려고 해도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혼자 있는 집이고 밤 11시가 넘었을 때라 어디에 연락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우선 한국에 있는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없었다. 앞집 할아버지를 깨우기에는 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참고 참다가 아뜰리에의 한국인 보스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침착한 말투로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혹시 지금 시간에 병원이나 응급실을 갈 수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봤다. 보스는 프랑스에서 혼자 걸어서 응급실 가면 절대 안 봐줄 거라고 만약에 정말 급하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 거라고 했다. 조금 더 기다려보고 계속 진정이 안되면 전화를 하라고 하고 끊었다. 심장이 계속 빠르게 뛰고 헛구역질이 났다. 다행히 얼마 뒤에 한국에 있는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단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어 봐. "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점점 호흡이 편안해졌다. 무서운 마음에 심장은 계속 떨렸지만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아마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예민함과 스트레스가 그날 처음 낯선 동네에 가면서 몸까지 긴장을 하고,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니 심하게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도 호흡곤란은 틈틈이 찾아왔지만 조금 눈을 감고 쉬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조금만 버티면 괜찮아졌다. 그리고 낯설고 무서웠던 파리 동역 동네도 점점 익숙해지고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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