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직업 정체성 혼란을 맞았을 때
내가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업과 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스타트업에서 PM으로 일한 지 9개월 차를 보내고 있는 지금, 새로운 나의 직업 정체성에 혼란을 맞았달까.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2의 혼란기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니 그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나 보다.
작년 가을, 공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에 성공하며 성장하는 조직에서 성장하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일을 하는 PM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을 발 빠르게 경험할 수 있는 IT 업계에서 유연한 조직문화와 열정적인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만족감과 새로운 커리어 패스를 잘 그려나가야지 하는 포부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를테면, 스타트업이 갖는 구조적인 한계, 성장이라는 허울 속 보이지 않는 조직의 무질서함, 재택근무의 허와 실, 무능력한 상사가 팀에 끼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몸소 경험하고 나니 의욕은 점차 꺾여 갔다.
사실 위의 이유들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인지, 잘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옅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직업과 직무 적합성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렵게 들어간 공기업을 그만두고 세상에 의미 있는, 작은 일이더라도 나의 역할을 통해 좀 더 빠르게 변화를 불러오는 일을 하고 싶다며 선택한 일이었는데 이게 무슨 힘 빠지는 말인가.
내가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 없이 스스로에 대한 직무 적합성을 판단했나. 스스로의 능력을 자신했나. 내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일은 무엇인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하지 않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몇 날 며칠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업무 시간에 일을 안 할 순 없기에 계속되는 회의와 주어진 업무를 그저 감당해 내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의욕에 가득 차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내 일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물의 차이는 꽤나 크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매번 마주하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몇 개월 째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앞으로의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삼십 대 초반을 보내고 있는 지금, 한창 열심히 일할 시기이기도 하고 한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아나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은 더 무거워졌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속에서 허우적대는 내 자신을 보고 있는 게 힘겨웠다.
어렴풋이는 새로운 커리어의 방향성을 만들어 가게 될 거란 생각을 하고 있다. 직업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든, 진로와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전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터널 속에 있는 시간만큼은 참 어둡고 막막한 건 사실이다. 온전히 그 짐을 짊어지고 빛을 찾아 나서야 하는 건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잘할 수 있겠지..?
내가 직업인으로서 일하는 이유는 크게 4가지다. 경제적 독립, 커리어 성장, 의미, 즐거움이다. 나열의 순서는 중요도 순이라기보다는 모두 다 나에겐 중요한 가치들이다. 우선순위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경제적 독립은 단순히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냄으로써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대가로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의미를 포괄한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어떠한 일을 함으로써 제 역할을 하고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이러한 부분에서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가장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경력을 쌓아가면서 전문성을 가지고 커리어를 성장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직장인'보다는 '직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은가. 직업인으로서 자신만의 뾰족한 무기를 갈고닦는 일은 개인과 조직이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그럼으로써 세상과 타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는 근원적인 이유를 '생계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다소 이상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일 것이다.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써 일을 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행위이기에, 그 자체로 숭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일을 통해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일이라는 건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부하고 일하는 것보다 쉬고 노는 것이 훨씬 에너지가 덜 드는 행위이며, 더 쉽고 재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힘든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의 성취는 달콤하다. 내 경우에는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여 얻은 성과와 변화를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다. 누군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타인에게 도움과 조언을 주며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 즐거움을 느끼는 지점은 다를지라도 분명 일이 주는 즐거움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하면서 직업과 일에 대한 브런치 글, 책을 많이 접했다.
다른 사람들은 직업과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하게는 '직업'과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스스로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기억에 남는 구절을 몇 가지 가지고 와 보았다.
#1
직장이 필요한 사람은 어떻게든 구해집니다.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면 됩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는 건 직장을 갖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제일 먼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그에 맞는 역량을 키우는 게 다음입니다.
#2
사실 일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에 있음에도, 저는 반골 기질의 헛똑똑이였어요.
그래서 프리랜서가 되기로 결심했고, 목표를 위해 다양한 직종에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독립의 날을 꿈꿨어요.
#3
이 시대의 직업은 '전문가'나 '타고난 재능', '돈벌이'로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직업과 일의 재정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일의 형태나 범위, 고용의 양상 등도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이처럼 불안정성과 유동성이 시대를 지배할 때야말로 일에 대한 주체적 해석이 필요할 것입니다.
#4
<매거진 B>의 조수용 발행인은 그동안 좋은 브랜드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은 사람을 보며
무엇보다 삶과 일이 일치한 이들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삶과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택한 '운 좋은 사람'도 분명 존재하지만
많은 경우는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자신의 길을 알아봅니다.
자신의 삶에 안정감을 느끼도록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의견은 참고만 할 뿐, 내 인생을 염색할 정도로 물들어 버리면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일어서서 내 앞에 놓인 길을 저벅저벅 걸어가 보려 한다.
길이 없다면 새롭게 길을 내어 가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중간에 주저앉아 버리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