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의 퇴사로그 #2
백수에게 평일의 빨간 날이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 중 하루이다. 직장인일 때는 평일의 휴일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는데 출퇴근의 의무가 없어지자마자 빠르게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평일의 휴일은 엄청난 메리트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사람이란 이토록 적응이 빠른 동물이다.
다만 이런 날에 외출하기엔 서울 전역 어딜 가나 사람이 많기 때문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래도 바깥공기를 쐬어야겠다면 집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광복절 휴일, 나만 왠지 집에 있는 것 같은 쓸데없이 억울한 느낌에 기어이 노트북과 이북 리더기를 들고 동네 카페로 갔다.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하고 있는데 친구의 전화가 울렸다.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자고 나오라고 했다. (어디든 사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근질근질했던 나는 오케이 했고 우린 오후 6시 반에 코엑스에서 만났다.
우린 인도 커리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1년 전쯤 처음 서울로 상경했을 때부터 가장 많이 만났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마음을 나눠 준 친구이기에 그만큼 애틋한 마음도 크다. 대학 동기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져 자주 만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시절 친구와 나는 성향적으로 정반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곧장 집으로 갔고 (학교생활에 충실했던 타입.. 적어도 그때는) 친구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알바를 가거나, 간혹 수업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당시에 우린 지금처럼 친하지는 않았고 서로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다른 점만큼 묘하게 비슷한 점을 찾게 되었고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약속을 잡았다. 1년에 1번 만나도 이상하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편해서 더 신기했다. 친구와는 내가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그냥 보기에는 하나도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공통점은 '성취욕이 많다'는 것이었다.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를 얘기하면 그와 관련한 또 다른 주제가 이어서 나와 말이 잘 통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둘 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나보다 더 외향적인 성격이라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것에 능숙했고 나는 그런 점을 옆에서 보면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일하는 데 있어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려는 노력도 많이 해주었는데 그런 부분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우린 2차로 와인 바를 갈까, 맥주를 마실까 고민하다 결국 친구네 집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말리부와 우유, 오렌지 주스, 과일과 과자 몇 개를 샀다. 말리부는 화이트럼에 코코넛을 으깨 넣어 숙성시킨 후 걸러서 만드는 럼의 일종으로 럼 특유의 맛에 코코넛향이 더해진 맛이다. 많은 칵테일의 재료로 사용되는데, 특히 오렌지 주스와 섞어 만든 말리부 오렌지가 대중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유와 섞어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술과 안주를 사들고 친구네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한쪽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했고, 피트니스 대회에 나가 받은 메달과 상장들도 있었다. (참고로 친구는 피트니스 센터 트레이너 강사이다.) 항상 바쁘고 열심히 사는 친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성과의 흔적들을 직접 보니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느껴졌다.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서로에게 추천해 준 책들이 꽂혀 있는 게 반갑기도 했다.
예쁜 잔에 칵테일을 제조했고 우리의 2차가 시작되었다. 일, 돈, 연애, 가족, 미래 등 우리의 대화 주제는 제한 없이 여기저기를 넘나들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웃긴 이야기를 하면 깔깔대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요 근래 이렇게 큰 소리로 웃어본지가 오랜만인 것 같았다. 분명 평소에도 안정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편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또 다른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과의 좋은 관계가 주는 행복이 크다고 하는가보다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다.
한참을 웃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쿵쿵'
뭐지? 순간 정적이 일었다.
당시 저녁 10시 30분이 넘어가는 늦은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무서웠다.
최근에 뉴스에 나온 흉흉한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린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인터폰으로 밖을 확인해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잘못 찾은 술 취한 사람인가. 누군가의 장난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뒤에도 조금 무섭긴 했다.
다행히도 이후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지만, 막차 시간에 맞춰 집에 가려고 했던 나는 오늘 하루는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우리 둘 다 현관문을 열기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백수인 나는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하루 자고 내일 오전에 집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아, 백수의 장점이 이런 데서도 발현되는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융통성 있게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직장인이었다면 애초에 평일의 휴일에 2차까지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만약 늦은 시간까지 놀다 다음 날 출근하면 컨디션에 무리가 온다는 것을 이제 경험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친구는 오전 6시 30분에 출근해야 했다..ㅎㅎ
침대에 누워 또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이 행복으로 다가왔던 하루였다. 평범한 하루가 주는 소중함이랄까.
예전엔 나에겐 뭔가 특별한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꿈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다. 그 특별함은 내가 만들어가면 면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찬 생각이랄까.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법도 없다. 무슨 일이든 100% 라는 건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나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니?'라고 묻는다면
평범하고 행복하게. 내 사람들과 건강하게.
라고 답할 것이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백수건 직장인이건 아니면 또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건 소소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