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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Sep 02. 2023

남동생이 가끔 집에서 자고 간다.

feat. 엄마 아들과 불금 보내기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나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둘 다 집을 독립해 서울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남매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서로의 무탈함을 확인하곤 한다. 우린 평소에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인데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각자의 일과 생활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서로의 필요성(?)을 느낄 때에 주로 연락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득 '얘가 잘 살고 있나, 왜 소식이 없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부가 궁금해지거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데 하필 연락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을 때, 한 명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만큼은 안부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혈육이라고 익숙한 얼굴을 보고 나면 안정감이 들 때가 있다. 신기하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길 하면 '남동생이랑 밖에서 밥을 먹는다고?'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동생과 밖에서 밥이나 술을 먹는 게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제 3자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집에서 매일 보는데 굳이 밖에서?'라거나 '동생이랑 술을 마신다고?'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나도 처음부터 남동생과 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남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생과 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놀이 상대였고, 뭘 해도 재밌고 즐거웠다. 같이 장난감 블록을 만들고 부수거나 놀이터에 가고 자전거를 탔으며 게임도 했다. 그러다가 누구 한 명이 더 좋은 장난감을 가지려고 싸우다가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그 누구는 대개 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왠지 모르게 그냥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2년 늦게 동생이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내가 동생을 더 잘 챙겨야지'하는 장녀 특유의 책임감이 더 발동되었다. 항상 등교를 같이 했고 동생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누가 괴롭히는 친구는 없는지 내심 신경 쓰고 걱정했던 같다. 어떤 날은 은서로 티격태격 장난치다가 몸싸움으로 급진전되기도 하고, 커가면서 점점 누나인 나보다 몸집이 커지는 남동생에게 힘으로 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왠지 모를 분함을 혼자 삭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남매 사이는 청신호였고 계속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며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생이 중학교 2학년 즈음일 때 사소한 다툼이 서로의 감정싸움으로 번져 며칠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먼저 사과의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 당시 사과의 액션이라 해봤자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장난을 거는 게 다였는데 말이다. 공부를 매우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공부와 진학에 열의를 보였던 나는, 나대로 예민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동생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였는지 평소와 다르게 괜한 자존심을 부렸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한 달간 한 집에서 지내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다 싶은, 도대체 왜 그랬나' 싶지만 그때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나 보다고 생각한다. 한 달가량의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다시 화해를 했고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흘러간다고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이다. 이때 이후로 동생과의 그 예전과 같은 '티키타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뭔가 어색해진 느낌이 확 들었다. 동생도 나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무서웠다. 나는 그래도 동생을 좋아하는데, 예전처럼 다시 잘 지내고 싶은데 장난을 치거나 말을 걸어도 자연스러운 과거의 그 '찐 바이브'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후반부는 거의 동생과의 교류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뭐 좋아지는 날이 오겠지'라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하며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도 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둘 다 성인이 되면서 다시 우린 친해지기 시작했다. 동생이 내가 다니는 대학교로 입학하면서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싸고 맛있는 밥집 술집도 많이 추천해 줬다. 그래도 2년 먼저 다녀봤다고 학교에서 어떤 행사를 언제 하는지, 무슨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도움이 많이 되는지도 알려줬다. 


"아 진짜? 알겠다"


라며 그 당시에는 듣는 둥 마는 둥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던 동생이 내가 알려줬던 밥집에 간다거나 추천했던 수업을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나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은근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고선, 그대로 따라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겉으로는 혹은 말로는 별로 반응을 하지 않다가 그 후에 보면 똑같이 하고 있는 동생을 보면서 '내가 좀 더 잘해야지, 좋은 곳에 취업해야지'라고 자주 생각하곤 했다. 결과적으론 그런 내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졌고, 감사하게도 우리 둘 다 원하는 직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평온한 주말 저녁,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통 먼저 전화 통화를 잘하지 않는 동생이기에 '나는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누나, 잘 있나"

"어어, 난 잘 있지. 니도 별일 없제?"


동생이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자신의 이직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외국계 IT 기업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은 얼마 전에도 직무에 대한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곤 했다. 회사나 동료들, 조직 문화는 너무 잘 맞고 좋은데 자신이 정말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은, 앞으로 계속해서 일하려는 직무가 아니어서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실 동생이 대학원에서 배운 컴퓨터공학과 개발 전공 지식을 '업'에서도 발휘하며, 전문성을 쌓아가는 것을 1순위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었다. 직업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해왔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링크드인 같은 커리어 소셜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법 같은 것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는 말도 꼭 잊지 않았다.


결과와 관계없이 서로를 항상 지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을 얻고 위안이 되는 것이다.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힘이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대개는 그 대상이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 많은 일상을 공유하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 가장 친한 친구 정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남매는 그 대상에서 서로를 더해 나는 + 남동생, 동생에게는 + 누나가 더해지는 것이다. 내 삶의 지지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벅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 먼저 너무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에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기에 더더욱 노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특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더 잘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동생이 이직하게 될 회사는 동생의 전공 분야와 연관성이 있는, 직무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곳이었고 하고자 했던 직무라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 남매가 이렇게 20대 후반, 30대가 되어서도 서로에게 정신적으로, 그리고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혈육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공통점이 많다. (다행히도) 그 공통점이 장점들이라 생각한다.
2. 사람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이 높다. 
3. 각자의 인생을 열정적으로 꾸려가고자 한다. 
4. 책이나 경험에서 인사이트를 얻으려 한다.  
5. 서로의 장점과 잠재력을 믿고 응원해준다.   


대체로 위와 같은 점들이 비슷하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서로 잘 통한다는 느낀다. 물론 크고 작은 다른 점들도 많지만 사이좋은 남매로 지내기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고 오히려 그 차이점들을 찾아보고 좋은 점들은 보고 배울 수 있는 같다. 


동생이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도 모르게 '남동생 프레임'을 씌운 채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동생은 역시 막내다, 내가 챙겨줘야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동생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 외로 말이 통하는 지점이 많았다. 가끔은 일이나 직장 관련한 고민 같은 걸 털어놓으면 진지한 조언을 나에게 해주기도 했다. '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제법인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생도 철이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오히려 내가 동생에게 배울 점도 많다고 느낄 만큼 말이다. 



금요일이었던 어제, 퇴근 후 동생과 나는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났다. 우리의 주 만남의 장소는 매번 서울대입구역이었는데 서로의 집의 딱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따라 양꼬치가 먹고 싶어서 양꼬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왠일로 순순히 따라와줬다. 우리는 양꼬치와 꿔바로우, 칭따오를 시켰다. 양꼬치와 칭따오의 조합은 언제나 환상이었다. 부모님을 자주 못 뵙는 대신, 남동생과 이렇게 가끔 저녁을 같이 먹는 시간을 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남매의 대화 주제는 의외로 넓다. 서로의 근황부터 시작해서 지금 회사 생활, 회사 동료와 생긴 일, 앞으로 각자의 미래, 친구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가끔씩은 연애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이건 뭐, 좋은 점도 안 좋은 점도 있는 것 같다. 양꼬치 먹다가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를 할 줄 몰랐지만.. 그럼에도 유익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저 꿔바로우를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우리 집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샀다. 안주는 김치 치 수제비와 불막창, 매운 새우깡, 프레첼을 샀다. 나는 '배부른데 적당히 사자', 동생은 '남으면 집에 두면 되니까 넉넉히 사자' 주의라 적당히 타협을 했다. 집에 들어와서 나는 빠르게 세팅을 했고, 동생은 집을 둘러보며 잔소리를 했지만 뭐 이런 날만큼은 나도 참기로 한다. 우리는 BGM을 깔아놓고 새벽까지 좀 더 떠들다 동생은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누가 들으면 '엄마 아들이랑 그렇게 노는 게 가능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남매는 그런 것들을 별로 개의치 않는 데다가 둘 다 편한 걸 좋아해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나 좋아하니까, 우린 친하니까"


라는 동생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동생도 나처럼 우리가 친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고 서로를 리스펙한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내 가족을 정말 사랑한다. 이 감정은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해야지.'하는 것과는 개념이 조금 다른 감정이다.


어쩔 수 없다. 혈육이란 것이 그런 걸...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있잖은가?


늘 동생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행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지지고 볶고, 싸우고, 서로 싫어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고 너무너무 힘들 때,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가족이 소중하다. 아마 다른 모든 분들도 그러리라..


그렇게 얘기하고 놀리고 웃고 떠드는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토요일 오전을 맞으니 조오금은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놀았다'라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동생을 보냈다. 다음에 또 놀자는 말도 덧붙이며.


엄마 아들과 불금 보내는 거, 나쁘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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