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절 인연이 찾아왔을 때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다. 연락을 하고 자주 만남을 갖는 친구는 딱 3명 있다. 그 자주라는 것도 2~3개월에 한 번 보는 빈도이다. 한 명은 고등학교를 함께 나와 지금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 한 명은 대학교 4학년 때 해외인턴을 가서 룸메이트로 지낸 이후로 취업 준비도 함께하고 지금까지도 서로 힘이 되어주는 친구, 한 명은 대학교 동창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져 마음을 나누는 친구다. 다른 친구들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중 많은 비중으로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았거나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특별히 외롭지는 않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도 꺼리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일대일 만남은 편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건 불편하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사회성을 학습했기에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사적인 만남이 어느 순간 소모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사실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게 된 내 모습이다. 20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동아리, 다양한 모임, 낯선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을 즐겼고 그렇게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하루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할 일이 생겼고, 내 울타리 내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마저도 쉬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자연스레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져 갔다. 그렇게 나도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만난 사람들과는 친구라고 할 수 있을만한 관계로 발전되지 못했다.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쪽이었다. 그래도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갈 때도 있다.
한 예로, 직장인 독서 모임에서 모임장을 하던 언니였는데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모임을 주관하고 대화 중간중간 슬며시 엿보이는 생활 방식과 행동들에서 지혜로움이 엿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모임을 하는 내내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이 주가 지났을까 나는 고민 끝에 그분에게 조심스레 카톡을 보냈다. 00 모임을 함께한 누구인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고전적인 멘트로 선 연락을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갑작스레 보낸 카톡에 분명 당황했을 것 같다. 당시의 나는 그 분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꽤나 컸었던 게 분명하다. 이성과 동성을 통틀어서 한 번도 그런 류의 연락을 먼저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무슨 용기로 그랬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그분은 반갑게 내 연락을 받아주었지만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나 같았어도 한 번 모임을 함께 한 것 외에는 서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선뜻 만남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이후로 사회인이 되어 새롭게 친구가 된 사람은 없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만남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지는 사람과는 애써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맺고 끊음이 보다 확실해지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줄었다. 어느 순간 혼자인 게 편해졌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산책도, 쇼핑도, 여행도 혼자 하는 게 익숙해졌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이 친구가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혼자 있어도 편안하다는 뜻이다. 혼자 있는 상황을 굳이 애써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혼자인 게 편한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편안한 사람이 있다. 전자인 나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저 서로가 다를 뿐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매일 독서실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취업 준비생 시절을 제외하면, 감사하게도 어려서부터 친구가 없었던 적은 없다. 친구라는 존재가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10~20대 시절을 외롭지 않게 보냈다는 사실과, 그때를 함께한 이들과 함께한 시절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어온 몇 안 되는 소중한 인연들과 현재 내 생활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우리가 만나게 된 곳은 앙금플라워 떡케이크 수업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뭔가를 그리고,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쪽 분야의 다양한 취미생활을 해왔다. 가령 도자기 만들기, 목공예, 플라워클래스, 가죽공예 등이 그것이다. 직장과 생활의 균형이 조금씩 맞아가고 있던 시점, 또다시 무언가를 새롭게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것 중에 재미도 있고, 배워두면 언젠가는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취미의 선택 기준이었다. 문득 티비 프로그램에서 한 번 본 앙금플라워 떡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래, 이번엔 이걸 배우자!
빠르게 초록창을 켜 앙금플라워 수업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검색했다. 내일배움카드라는 것을 발급받으면 수강료의 50%는 국비지원을 받아 수강료의 절반 가격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마다 하는 수업이었고 2개월이 조금 넘는 과정이었다. 실행력이 꽤 좋은 나는 바로 이 수업을 듣기로 결정하고 바로 수업을 신청했다.
첫 수업날이 되었다. 새롭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생각에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교육장에 도착했다. 먼저 와 계신 분들도 5명 정도 있었다. 나도 책상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업 정시가 되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수강생이 내 자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나보다 살짝 어려 보이기도 한 그 수강생은 책상 앞에 놓인 수업 자료를 한번 살펴본 후 선생님께 집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과 내가 친해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날 첫 시간은 수업 커리큘럼에 대한 소개, 강사와 수강생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모두들 간단히 클래스를 듣게 된 이유, 이름 등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이후 앙금플라워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들, 앙금의 종류, 짤주머니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앙금플라워의 기초인 장미 짜기를 배웠다. 영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던 앙금 짜기는 막상 직접 내가 짜보니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앙금이 너무 묽어서도, 너무 되직해도 안 되고 적당한 점성을 가질 수 있도록 물을 조금 섞어 묽기를 조절해 주고 적당량을 짤주머니에 채워 적당한 손의 악력을 주어 꽃잎 한 잎 한 잎을 짜야 비로소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처음 꽃잎을 짜보니 생각보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물을 더 섞으니 그제서야 조금 수월하게 꽃잎이 짜졌다. 내심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서 첫 수업을 들어간 나는 '역시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계속 반복 연습을 하면서 다른 수강생들의 것과 비교해 보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며 아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대화를 하게 되었다.
"와, 되게 잘하시네요."
"이건 선생님이 해 주신 거예요."
"옆에 짜신 것도 되게 예뻐요. 진짜 장미꽃 같아요."
"정말요? 감사해요."
첫 수업이라 모두가 서툴렀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나는 먼저 칭찬을 건넸다. 그 사람도 겸손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내 말에 호응을 해주었다.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더 이어갔고 얼마 되지 않아 나이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또래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동갑일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우린 나이가 같았다. 왠지 더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후로 2회 차, 3회 차 수업마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 이야기, 하고 있는 고민, 지금 잘 되고 싶은 썸남 얘기까지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여서인지 서로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이 없었고 어떤 주제로도 이야기가 쉽게 이어졌다. 수업 중간 저녁을 같이 먹으며 우린 깔깔 웃어댔다. 그 친구와 나는 mbti가 끝에 하나를 제외하고 같았다. mbti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성격적인 부분에서 공통점이 많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로 공감도 더 잘할 수 있었다.
나이가 같았음에도 우리는 서로 말을 놓지 않았고 존댓말로 얘기했지만 오래 본 친구처럼 편안했다. 그 친구는 시원 털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했다. 대학시절 교수님께서 지어준 별명이 선머슴이라고 했다. 너무 웃겼다.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더 끌렸다. 가볍게 얘기하는 것 같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도 잊지 않았다.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진 나와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 친구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회 차나 되는 수업을 종강하고 우린 따로 만나 놀기로 했다. 나는 다른 사정으로 끝까지 수업을 듣진 못했지만 내가 먼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약속한 일요일 오후, 우린 약속 장소에서 만났고 칵테일을 마시러 갔다. 그 친구와 나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둘 다 애주가라는 것이다. 누구 하나 낮술인데 괜찮겠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뭐 어때? 마시고 싶으면 마시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얼그레이 하이볼을, 친구는 가게의 시그니처 맥주를 주문했다. 또 한 바탕 이야기꽃을 피우다 각자 한 잔씩 더 마신 후에야 우린 저녁을 먹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메뉴는 대방어. 친구가 맛있다고 유명한 집이라고 해서 따라갔는데 대기가 너무 길었다. 4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사장님의 말에 우린 미련 없이 다른 곳을 찾아봤다. 맛집에서 꼭 줄을 서지 않는다는 것도 같았다. 다행히 주변에 '빛나는바다'라는 횟집이 있었다. 가게 이름 마음에 드는데?라고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올해 첫 대방어였다. 둘 다 회를 좋아했고 소주 한 잔과 함께 먹는 대방어는 말이 필요 없었다. 입에서 녹는다는 말의 참뜻을 알게 해 주었다. 우린 먹고 마시며 각자의 '일'에 대한 미래 계획, 연애나 결혼, 심지어 나는 최근 좋아하게 된 연예인 얘기까지 했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타입인데 근래에 빠진 연예인이 있어 그걸 또 얘기하고 싶었나 보다. 친구는 깊게 공감을 못하는듯한 티가 다 났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친구는 다음에 12월에 열리는 세계음식축제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고민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종종 만나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좋았다. 더구나 성인이 된 후로 학창 시절 친구들,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을 제외하고는 새롭게 친구를 사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절 인연이 다가온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친구와의 인연 또한 얼마나 깊어질지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지금, 현재의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인연이고 서로가 통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고 환경이 변해도 그때, 그 환경에 맞는 친구를 만들 수 있고 그들과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새로운 인연을 소중히 하고, 나에게 다가온 인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음에 함께할 우리의 시간이 기대된다. 아마 유치한 장난과 쓸데없는 이야기에 또 깔깔대겠지만 우리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