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애주가의 고백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을 잘 마시느냐고? 아주 잘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못 마시는 편도 아니다.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함께 마시는 것도 가끔은 좋긴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것은 혼자 조용히 즐기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마실 때는 2명이서 먹거나 많아도 4명 내로 모여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인원이 자리를 하다 보면 대개 술자리는 회식 분위기가 되기 십상이고 진솔한 대화보다는 허황되거나 부풀려진 이야기, 장난스러운 말들이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면 왠지 모를 허무함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맞는 술을 탐색하고 그 술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찾아 즐기고, 적당량으로 과식 또는 과음하지 않는 절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깊고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술의 세계를 온전히 그리고 오랫동안 꾸준히 탐험하기 위해서는 매번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유독 술을 더 마시고 싶은 날이 2가지가 있는데 아주 기분이 좋을 때와 많이 힘들 때이다. 좋거나 나쁠 때 모두 술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적당히가 중요하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회사에서 일과 사람 관계로 스트레스가 많았던 시기에는 거의 일주일에 3번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안 좋은 방법이지만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나마 감각이 무뎌져 적어도 그날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다른 건강한 해소법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고 합리화를 한다.
반대로 기분이 좋거나 행복할 때도 술을 찾게 된다. 이 좋은 기분에서 알코올의 힘을 조금만 빌리면 손쉽게 텐션을 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쁨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행복한 기분으로 좋아하는 술과 잘 어울리는 안주를 준비하고, 아늑한 조명을 켜둔 채 마시는 와인이나 맥주는 황홀하다.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혹은 내가 체질적으로 술을 즐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 즐거움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테니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행복에 잠기면 그만이다.
아, 혼자 마시는 술이 주는 효과는 한 가지 더 있다. 이건 아마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 수도 있는데 몸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우리의 감각은 조금 더 살아나고 감정은 선명해진다. 내 마음속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나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더 잘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평소에 자연히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현재의 상태를 파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런 능력에 있어서는 부족한 사람인지라, 술의 힘을 빌려 내 감정과 생각을 자세히 살피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사실조차 알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아, 나는 나의 감정을 보살피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평소에는 내 몸이 힘들다고 기어이 신호를 줄 때까지 '난 괜찮아, 이 정도는 거뜬한데 뭘'이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태를 살피는 데 더 집중했을 때가 많았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감수하면 타인이,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더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는 무디게 반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얼마간은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해결 방법을 모른다는 것은 나를 답답하게, 또 무력하게 했다. 그러다 결국 찾아낸 해결책은 '술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혼자 술을 마시다 보면 현재 내 감정이 어떤지, 진심이 무엇인지, 며칠 전 있었던 그 일에서 나는 왜 상처받고 힘들어했는지, 누구를 만났을 때는 왜 그렇게 기뻤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차례대로 밀려왔다. 이게 내 진짜 마음이었다. 알코올 때문에 예민해진 감각과 솔직한 마음이 마치 나에게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평소의 나는 대체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편이었기에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 너무나도 서툴렀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감정인데도 말이다. 이 사실까지 인지한 순간에는 문득 스스로에게 연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문제와 해결책을 알았으니 (더욱 건강한 해결책은 앞으로 더 찾아볼 예정이다) 알코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일상에서도 세심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혼자서 술을 마시며 생각과 감정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이 시간들이 소중하고 편안하고 좋다. 는 느낌도 들었다. 이건 나만의 혼술을 즐기는 방법이고 온전히 나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시원한 캔맥주가 생각나 혼술을 했다. 편의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인 스텔라를 샀고 에어프라이어로 치즈 토스트를 만들었다. 나는 치킨과 맥주 조합도 좋아하지만 빵과 맥주 조합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칼로리 폭탄인 조합이지만 직접 만든 토스트나 도넛, 에그타르트 같은 빵과 술을 곁들이면 그 자체로 행복이다. 맥주나 와인은 의외로 케잌과도 잘 어울린다. 호두나 캐슈넛, 아몬드 같은 견과류는 간단히 마시고 싶을 때 맥주 한 캔과 함께하면 환상의 짝꿍이다.
이렇게 술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다. 중요한 일을 잘 마무리했거나, 몸과 마음이 고될 때 마시는 술은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나면 '그래, 한 잔 했으니 털고 내일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하는 거야.'라며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종종 친구나 가족을 초대해서 같이 마실 때도 있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술과 함께 하는 저녁은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사진으로 찍어두는 것으로 모자라 타임캡슐 같은 게 있다면 이 순간을 타입캡슐에다 저장해 두고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순간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자신만의 취향 혹은 취미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분명 일상의 탈출구와 기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요즘의 나의 일상은 아주 기쁜 일도, 많이 힘든 일도 없는 평온하고 잔잔한 일상이다. 이전보다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았으며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매일 하루하루가 주어짐에 감사하며, 거뜬히 그 하루치들을 살아나가고 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한 것이 평온하고도 평범한 일상이 아닐까.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복권에 당첨되어 많은 부를 얻고 좋은 물건을 가지는 것만이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물론 큰 행복이지만 큰 행복은 단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고 평범한, 매일매일의 반복이라 지겹다고 느껴지는 하루치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큰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 행복이 왔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와 함께 술 한잔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발을 굴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