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완도수목원과 상왕산 트레킹
지난 1월 26일, 완도 상왕산에 봄의 전령사로 알려진 복수초가 겨울 한파에도 불구하고 황금색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3주가량 흘러, 잘하면 복수초는 물론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 산자고(山慈姑)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완도로 향한다. 작년 이맘때 소안도 가학산의 양지바른 풀밭 여기저기에서 흰빛을 띤 녹색 꽃잎의 산자고를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하필, 완도로 출발하는 새벽 날씨는 겨울의 시베리아로 회귀하고 있었다. 물론 기상청 누리집 검색을 통해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에 머물 것이라는 예보는 접했지만 남해고속도로에는 올겨울 접하지 못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침 8시쯤 완도에 도착했지만 눈보라는 계속되어 상왕봉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일단 완도수목원에 들러 난대림에 관한 식견을 넓힌 후 그곳에서 상왕봉에 오르기로 하고 개관 시각인 9시에 수목원에 도착한다. 이른 시각인 데다 날씨가 추워 우리 외에 관람객을 찾아보기 드물다.
완도수목원은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1년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는 난대림과 다도해의 경관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간직하고 있으며 붉가시나무, 황칠나무 등 770여종의 희귀 난대식물이 분포하는 국내 최대의 난대림 자생지이자 유일한 난대수목원이다.
완도의 진산인 상왕봉과 백운봉, 업진봉을 중심에 두고 600만 평의 상록수림 안에 아열대온실, 난대림 생태탐방로, 산림박물관, 수변데크 등을 갖추고 1991년 개원했다.
난대림이란 연평균 기온 14°c 이상, 1월 평균기온 0°c 이상, 강수량 1300~1500mm, 북위 35도 이상의 남해안과 제주도, 울릉도 지역 등 온난하고 일교차가 적으며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자라는 상록활엽수림을 말한다.
우리나라 주요 난대 종으로는 녹나무, 황칠나무, 팽나무, 비자나무, 초피나무, 목련, 후박나무, 동백나무, 생달나무, 모빌잣나무 등이 있는데 완도수목원에는 붉가시나무가 수목원 산림의 50~60%를 차지하고 있다.
완도수목원은 테마별로 잘 조성되어 있어 계절별로 어느 때 가더라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오늘은 아열대 온실을 먼저 둘러본 후 상왕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원점 회귀하여 제1전망대→난대림 푸른까끔길→산림박물관→ 수변데크 순으로 트레킹 하고자 한다.
아열대식물원은 열대·아열대 식물을 심어 놓은 곳으로 추운 겨울에도 열대의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온실이다. 고온다습한 적도 지역에서 서식하는 열대식물과 고온 건조한 지역의 아열대 식물 등 보기 힘든 식물들이 전시돼 있다. 야자나무류, 관엽식물, 고무나무, 문주란 등과 한라봉, 하귤 등이 자라고 있으며 허브식물로 라벤더류, 로즈마리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워싱턴야자, 코코스야자, 극락조화, 인도보리수 등 열대·아열대 식물과 용설란 등 선인장 및 다육식물 500여 종을 관람할 수 있다.
아열대식물원 관람을 마치고 침엽수림원과 제1전망대 방향으로 난 널따란 임도를 따라 본격적인 상왕산을 트레킹에 나선다. 상왕산은 주변에 상왕봉(664m), 백운봉(601m), 심봉(598m), 업진봉(544 m), 숙승봉(461m) 등 다섯 개 봉우리를 아우른다.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뤄졌다 하여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산 이름도 없이 '상황봉'이라 칭하며 다섯 봉우리를 아울러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봉의 '황' 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일본 황제를 칭송하기 위해 바꿔 붙인 이름이다.
이에 완도군은 잘못된 이름을 바로 잡고자 '상황봉 산 이름 바로 찾기 위원회'를 구성해 상왕산 지명 제정과 상왕봉 명칭 변경 등을 추진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2017년 6월 23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에 의거 상황산은 상왕산으로, 상황봉은 상왕봉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상왕산은 크고 작은 200여개 섬에 둘러싸여 완도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으로,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을 눈이 시리도록 조망할 수 있으며 새벽 일출명소로 유명해 연중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흰 꽃가루 같은 눈이 설핏 깔린 푸른 난대림 사이로 임도는 지그재그 시나브로 고도를 높여나간다. 이른바 ‘흰구름길‘이라 명명된 트레일인데 3km 남짓 오르자, 백운봉과 상왕봉 사이 제2전망대에 도착한다. 이정표가 잘 구비되어 있어 초보자라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제2전망대에 서니, 좌측으로 우뚝 솟은 백운봉이 보이는데 항상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운봉 너머로 해남의 대둔산과 두륜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또한 정면으로는 대야리 저수지와 그 너머로 신지, 약산 등 완도 동쪽의 다도해들이 어슴푸레하게 조망된다.
제2전망대에서 상왕봉 오르는 구간은 오름길과 평지가 균형을 이루며 이어져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염두에 두었던 복수초와 산자고 구경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산은 온통 엷게 내린 눈으로 흰색의 천지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한가하게 눈밭을 헤집어가며 봄의 전령사들을 찾아볼 여유가 없다.
제2전망대에서 1.5km 정도 오르자 상왕봉 정상이다. 정상 동쪽의 표지판에는 다도해 사진과 함께 고금, 금당, 약산, 금일, 생일, 신지, 주도, 청산을 표시해 놓았지만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멋진 광경을 구경할 수 없다.
남쪽으로 설치된 표지판도 마찬가지다. 소안도, 구도, 횡간도, 노화도, 보길도 등이 표기되어 있지만 제대로 다도해의 광경을 볼 수 없다. 평소 주말 정오쯤이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산인데 20여 분 동안 정상에 머무는 동안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상왕산에서 백운봉 방향으로 다시 회귀하여 걷다가 수목원 제1전망대로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제1전망대까지는 1.8km인데 한동안 전망 좋은 능선이 이어진다. 이곳은 양지바른 지역인데 발치 아래로는 낭떠러지여서 전망은 그지없이 좋다. 정면으로는 상왕봉과 심봉이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우측 바다 건너로는 해남의 달마산이 흐릿하게 펼쳐진다. 준비해 간 간식을 펼쳐, 허기를 달랜다.
이곳에서 제1전망대까지는 조금 가파른 내리막이다.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3층으로 된 전망대(팔각정)에 도착하니, 사방으로 드넓은 완도수목원의 전경들이 펼쳐진다. 이담 때쯤이면 전국 대부분 산은 잿빛을 띠고 있는데 이곳 풍광은 온통 푸른빛이다.
제1전망대에서 죽 산림박물관 방향으로 하산하는 ‘난대림 푸른까끔길’은 계곡을 건너 아기자기한 소로로 이어진다. 길섶에 콩자개넝쿨과 이제 갓 피어나는 동백꽃도 한두 송이 보인다.
산림박물관이 가까워지나 했더니 ‘숯가마터’가 나온다. 이른바 붉가시나무 숯가마터인데 붉가시나무는 일반 온대성 참나무 숯에 비해 강도가 높고 화력이 쌔서 불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년) 공납 기록이 있을 정도로 지역 주민의 생계수단으로 예로부터 붉가시나무를 활용해 숲을 많이 구워냈다. 이 숯가마터에서는 1960년대까지 숯 생산 활동을 지속했는데 숯 제조 분야 명인 ‘정무삼 씨에 의해 2015년까지 그 명맥이 유지됐다고 한다.
산림박물관은 ㅁ자형 형태의 전통 한옥 양식으로 2009년 11월에 개관했다. 4개의 연속된 전시공간에는 다양한 난대수종과 야생동·식물, 곤충표본, 난대림 문화와 목공예품 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시공간과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와서 둘러본다면 숲에 대한 교육 장소로 그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 동백나무원에 이른다. 수많은 동백나무가 키재기를 하며 숲을 이루고 있지만 몇 송이 외에 대부분 망울을 맺고 있어 아직 제철은 아니다. 동백나무원 아래 수변데크로 내려선다. 지난가을 피어나 아직 잎을 다 떨구지 못한 갈대 너머 출렁이는 수변 위로 지나온 완도수목원과 상왕산 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오후 3시 40분, 이곳에서 완도 봄나들이 트레킹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