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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트레커 Nov 07. 2022

전남 완도 보길도

- 멀리 제주도가 보이는 윤선도의 섬

봄 동백꽃도 좋지만 늦가을 난대상록수림도 좋은 섬


바삭한 늦가을 햇살이 수면 위로 반사하여 집 거실까지 파고드는 바람 없는 아침,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전남 강진에 일주일 살이를 하러 내려온다는 것이다.


친구가 강진 일주일 살이 중 하루는 보길도에 가고 싶다기에, 나주에서 명품 배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 부부와 함께 따라나선다. 생각해 보니 보길도는 세 번쯤 다녀온 것 같다. 대학 시절 두 번 세연정과 예송리 해변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보길도와 노화도를 연결하는 연도교가 없어, 땅끝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 청별항에서 내렸다.

보길면사무소 앞에서 바라본 노화도

그리고 지난해, 은퇴 후 보길도에 정착하시어 소설가로 인생 2막을 살고 계신 은사님을 찾아뵈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마을 뒤로 펼쳐진, 마치 신선이 살 것만 같은 보길도의 서기 어린 산세를 보면서 동백꽃 피는 이른 봄에 꼭 종주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조선시대 3대 정원에 꼽히는 세연정

그리고 올해 2월 초 동백이 눈 속에서 한 송이씩 꽃망울을 터뜨릴 무렵, 보길도로 향했다. 집을 나설 때는 바람이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완도 화흥포항으로 다가갈수록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항구에 도착해, 두어 시간 기다렸으나 배의 출항이 연이어 취소되는 바람에 돌아서서 완도수목원으로 향했다. 수목원 관람 후 트레일을 따라 완도 제1봉 상왕봉까지 원점 회귀했는데 막 피어난 동백과 울창한 난대림이 너무 좋아, 가지 못한 보길도의 아쉬움은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세연정·동천석실 등 부용동 원림에서 마주하는 윤선도의 세계


동천석실

보길도를 가는 뱃길은 해남 땅끝 갈두항과 완도 화흥포항 두 곳이다. 양쪽 모두 노화도 하선(갈두-노화 산양, 화흥포-노화 동천) 후, 다시 보길도까지 육로로 이용해야 한다.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지나 소안도 가는 뱃길은 시야가 확 트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바다 위로는 전복 등 양식장 부표들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아스라이 떠 있고, 그 너머로는 호남의 금강이라 할 수 있는 해남의 달마산과 완도 상왕봉이 위엄을 자랑한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건너편에 낙서재와 곡수당이 보인다

승용차를 가지고 탑승하여, 동천항에 도착한 후 승용차로 20여 분 만에 보길도 세연정에 도착한다.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연회장으로 쓰기 위해 조성한 정자로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국문학의 양대 거목으로 기억되는 윤선도는 병자호란 후 보길도에 자리를 잡는다. 병자호란 당시 해남에 있던 그는 가노와 주민들로 의병을 조직, 서해를 통해 강화도로 향하던 중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뱃머리를 돌려 남하하게 된다.

낙서재 오르는 길. 우측이 윤선도가 살았던 낙서재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그였기에 절망감이 몰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던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는 데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는 세상에 다시 나서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제주도 은둔을 결정한다. 제주도로 향하던 중 바람길이 바뀌어 잠시 보길도에 정박한 후 그곳의 산세를 둘러보다가 부용동(芙蓉洞)을 발견하고 정착하기에 이른다. 1637년, 고산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 후 세연정(洗然亭)과 곡수당(曲水堂), 낙서재(樂書齋), 동천석실(洞天石室) 등 부용동 원림을 조성하고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의 시가를 남겼다.

곡수당. 건너편 산 가운데 동천석실이 있다

늦가을의 끝자락, 세연정에도 어김없이 소슬바람이 분다. 연못엔 물이 거의 말라 있지만,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은 관광버스와 승용차들로 거의 꽉 차 있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세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연못과 정자, 일곱 바위, 비홍교, 무희들이 춤을 췄다는 서대와 동대, 판석대 등을 느긋하게 둘러보며 은둔자의 멋스러움에 감탄한다.


보길도 최고봉 격자봉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광과 제주도의 모습


곡수당에서 큰길재 오르는 등산로. 난대상록수림으로 숲을 이뤘다

세연정을 둘러본 후 다시 승용차로 곡수당과 낙서재, 동천석실이 갈리는 보길도 댐 아래 삼거리로 향한다. 보길도 격자봉을 오르는 등산로가 곡수당 뒤로 나 있어 우선 동천석실부터 가기로 한다. 동천석실은 입구에서 왕복 1km 정도의 거리인데 길은 평편한 동백숲으로 이어지다가 조금 고도를 높여 산 중턱까지 이어진다.

수리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부용동. 가운데 보길도 댐이 위치해 있다

동천석실은 가파른 암릉 위에 지은 한 칸짜리 정자인데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천이란 신선들의 거주처인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연유된 이름이라 한다. 석실에 올라 보니, 접시 모양으로 움푹 파인 부용동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콩자개넝쿨

동천석실에서 내려와, 건너편 낙서재로 향한다. 낙서재는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음에는 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만든 모옥(茅屋)이었으나 후손들에 의해 와가(瓦家)로 바뀌었다고 한다. 낙서재 아래에 있는 곡수당은 고산의 아들 학관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한 칸짜리 집이다. 낙서재 표지판에는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이곳 인근에 이르러 곡수를 이룬다고 적혀있다. 아쉽게도 부용동 원림을 이루고 있는 이들 건물은 옛 그대로의 모습이 전해오는 것은 없고, 훗날 재현한 것들이다.

격자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완도의 섬들

이제 곡수당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육지의 나무들은 서둘러 나목이 되어가는데 곡수당에서 큰길재 오르는 길은 동백나무와 소사나무 등 상록수림으로 터널을 이뤘다. 청별항, 예송리, 격자봉(433m)으로 길이 갈리는 큰길재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이곳에서 격자봉 정상까지는 1.9km인데 경사가 급하지 않고 완만해 트레킹하기에 적격이다. 등산 경험이 많지 않은 여성과 어린이도 무난히 오를 수 있을 듯하다.

보길파출소-큰길재-수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격자봉을 향해 차츰 고도를 높여나갈수록 남해의 멋진 다도해들이 숨었던 얼굴을 내민다. 동서 쪽으로는 노화도와 넙도 등 부속 섬들이, 동쪽으로는 소안도와 그 너머 청산도가 그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풍광의 절정은 격자봉 정상에서 보는 추자도와 제주도다.


물범이 막 물질을 마치고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보옥리 공룡알 해변


구름인가 섬인가, 격자봉에서 줌으로 당겨본 제주도

한라산은 마치 접시를 엎어 놓은 듯 바다 끝에 아스라이 떠 있다. 섬 트레킹을 하면서 오늘처럼 제주도를 본 적은 처음이다. 보길도에서 제주도까지는 70km가 넘는다는데 육안으로 볼 수 있음은 청명한 가을 날씨가 주는 선물임에 분명하다.

뽀래기재 하산길에 만난 전망대

다소 흥분된 마음을 간직한 채 격자봉에서 뽀래기재로 내려와 보옥리로 하산 후 지척에 있는 공룡알해변으로 향한다. 공룡알해변은 커다란 몽돌들이 마치 공룡 알 형상으로 모여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햇살에 반사된 검은색 몽돌들은 마치 바다에서 물질을 마치고 갓 나온 물범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공룡알해변

트레킹에 동행하지 않은 일행이 대기시켜 둔 차량을 이용해 이제 땅끝전망대로 향한다. 그곳에서도 추자도와 제주도가 보여 몇몇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기에 바쁘다. 이곳에서 정자리로 조금 내려가면 국내에서 가장 큰 황칠나무가 있다기에 찾아 나선다.

땅끝전망대. 앞에 보이는 섬은 추자도이며, 좌측으로 희미하게 제주도가 보인다

그런데 둘레 102㎝, 수고 15m로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황칠나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물어볼 마을 어르신들도 보이지 않아 30여 분 헤매다가 포기하고, 보길도 동쪽 끝 백도리에 있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암각시문(일명 글씐바위)’을 향해 떠난다.


송시열의 ‘암각시문(岩刻詩文)’에서 느끼는 역사의 아이러니


송시열의 암삭시문(글씐바위)

숙종 14년 희빈 장 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정월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했는데 송시열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을 당해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그는 귀양길에 풍랑을 만나 며칠간 보길도에 머물면서 백도리 암벽에 시를 새겨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제주도에 도착해 잠시 귀양살이 도중 국문(鞫問)을 받으라는 어명을 받고 상경하다 정읍에 이를 무렵,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니 그이 나이 83세였다.

석양이 짙어가는 소안도 풍경. 가운데 뾰족하게 가학산이 보인다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 속에서 송시열은 서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했으며 송시열의 탄핵으로 윤선도가 유배를 갔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정적이었다. 그런데 윤선도의 은둔지였던 보길도에 송시열이 며칠을 머물면서 해안 절벽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구를 남겼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완도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된 ‘송시열 암각시문’의 표지석은 그 내용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여든셋 늙은 몸이/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에 있구나/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북녘의 상감님을 우러르며/남녘 바닷바람 잦기만 기다리네/이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북극공첨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


바위에 새겨진 원본 시구는 풍상에 마모되어 제대로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보는 이의 마음이 착잡하여 가는데 석양이 점점 짙어가는 건너편 소안도의 풍광은 무심코 아름답기만 하다.

완도 화흥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의 석양


《여행 가이드》


1. 여행 팁


    o 완도 보길도는 동서가 12km, 남북이 8km의 크기로 노화도, 소안도, 넙도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32.98㎢, 해안선의 길이는 41km로 청산도 크기의 꽤 큰 섬이다.

     - 섬 일주도로는 예송리~보옥리 구간만 단절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구간이 연결되어 있어

       승용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게 좋다.

노화도(동천항)와 구도를 잇는 연도교

2. 여객선 이용 방법

    o 완도읍 화흥포항 → 노화읍 동천항

       하루 11회 운항/40분/6500원

       *문의 전화 : 화흥포항 매표소 (061)555-1010

    o 해남 땅끝(갈두항) → 노화읍 산양항

       하루 12회 운항/30분/6500원

      *문의 전화 : 땅끝여객선 매표소 (061)536-5688, 노화농협

                                               (061)535-5786, 해광운수


3. 보길도 즐기기 : 명소탐방, 트레킹

    o 명소 탐방

      - 부용동 원림 : 세연정→동천석실→낙서재→곡수당

      - 송시열 암각시문

      - 예송리 갯돌해변. 중리 해변, 공룡알 해변


    o 트레킹 코스별 탐방로

      - 1코스 : 보길파출소→큰길재→수리봉→격자봉→뽀래기재→보옥리(9km, 5시간)

      - 2코스 : 곡수당→큰길재→수리봉→격자봉→뽀래기재→보옥리(6km, 3시간)

      - 3코스 : 예송리→큰길재→수리봉→격자봉→뽀래기재→보옥리(6km, 3시간)

      - 종주 코스 : 땅끝전망대→망월봉→뽀래기재→격자봉→수리봉→큰길재→곡수당

                       →낙서재→세연정→청별항(9km,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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