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강화나들길 제13코스 볼음도길
겨우내 기다렸던 바다를, 안개 자욱한 봄날에 실컷 만났다. 볼음도 가는 길, 아침 강화도 마니산 기슭 선수선착장에서 육지의 길을 끊고 배가 출발한다. 배는 해발 제로의 평편한 길 위로 힘차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육지 풍경과 점차 멀어진다. 갈매기떼는 겨우내 움츠렸던 기지개를 아직 켜지 못한 탓일까? 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시도, 주문도 지나 은염도에 이를 무렵에야 겨우 두 마리 모습을 드러냈다.
면적 6.36㎢, 해안선 길이 16km인 볼음도는 북쪽의 봉화산(83m)과 서쪽의 요옥산(103m) 등 대체로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섬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인조 때 원병 수신사인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로 출국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에 피신했는데 그때 섬 위로 뜬 환한 보름달이 떠, 만월도(滿月島)라 했다가 볼음도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화 앞바다를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볼음도 선착장은 한적하고 느슨하다. 지난해 겨울, 옆 섬인 주문도를 방문했을 때처럼, 선착장 한 켠에 진을 치고 있어야 할 고깃배들이 보이지 않는다. 볼음도·주문도 앞바다는 예전 꽃게, 새우 등의 어족자원이 풍부해 어업 전진기지로 호황을 누렸으나 지금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설정돼 있어 사실상 조업이 어렵다.
# 여름철이면 가족 체험여행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영뜰해변’
볼음도 대합실 좌측의 ‘강화나들길 13코스’ 안내판을 잠시 살펴본 후 본격적으로 볼음도길 걷기에 나선다. 동행자는 강화나들길 총 20개 코스(310.5km) 중 볼음도길만 빼고 종주를 완료한 친구 부부다. 봄 뱃길이 풀리길 겨우내 기다렸던 트레커들 서너 그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송림 앞 모래 해변을 지난다.
봄 오는 길목, 볼음도 앞바다는 온통 희뿌연 안개로 자욱해 지근거리의 아차도와 주문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듬지마다 새들의 혀처럼 무수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새순들을 바라보며, 물엄곶을 지나 조갯골해변에 도착한다. 조개골해변은 해송 숲 모래가 바다로 쓸려나가서 않도록 돌로 제방을 쌓았지만, 자연의 힘은 막을 수 없는 듯 제방 자체가 바다 쪽으로 3~4m 밀려나 있다.
이어 볼음도의 대표 해변인 영뜰해변으로 향한다. 영뜰해변은 모래와 뻘이 다져져 만들어낸 광활한 뻘밭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 아니라 바닷가 깊은 곳까지 트랙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단단한 갯벌이다. 여름이면 백합 조개와 꽃게, 소라 등이 많이 잡혀 가족 단위의 갯벌체험(해루질)을 하는 피서객들이 많다고 한다.
또한 갯벌에 말뚝을 박아 그물을 설치하고 밀물에 따라 들어온 밴댕이를 썰물에 잡기도 한다. 전통 조업방식인 건강망 어업이다. 밴댕이는 잡힌 즉시 죽는 성질이 있지만 볼음도에서는 싱싱하고 고소한 밴댕이회와 밴댕이회무침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의 영뜰해변은 한적하기만 하다. 안개 너머, 바다 멀리에서 트랙터 소리인지 경운기 소리인지 모를 기계음이 들려올 뿐이다. 왠지 풍광이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충만한 마음이 든다. 신현림의 시처럼 어느새 우리도 바다를 닮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시계너머로 무연하게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며 사라진 옛 시간, 사라진 옛사람들을 넌지시 그려본다.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볼음도 랜드마크인 ‘800년 된 은행나무’
영뜰해변에서 요옥산을 지나 볼음도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은행나무로 향한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언덕 위에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 25m 정도의 노거수로 천연기념물 제304호로 지정됐다. 800년 전 황해남도 연안군에 있는 부부 나무 중 홍수로 떠내려온 수나무를 건져 이곳에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의 은행나무도 북한 천연기념물 165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볼음도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니 서산 웅도의 400년 된 반송이 생각난다. 작은 섬들에서 저런 거목이 자랄 수 있음은 대를 이은 마을주민들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된다면 남북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도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이제 볼음도 저수지다. 작은 섬에 이렇게 큰 저수기가 있어 식수 걱정과 농업용수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큰 저수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들판이 넓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볼음도 앞바다는 새우잡이로 유명한 바다였다 한다.
“볼음도 및 아차도는 은염어장이 형성돼 새우젓으로 유명했으나 어로 저지선이 3차에 걸쳐 남쪽으로 내려와 고기잡이가 어려워지고 한강의 오염 증가로 고기가 고갈되는 등 위기를 맞게 된다. 볼음도 및 아차도 어민들은 전북과 군산으로 이전하거나, 전남까지 장기 출가 어업을 하기 시작한다. 강화 선수포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해일호 선장 이주학씨, 선수어촌계장 지유식씨 등도 장기 출가 어업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김용구 저서 중)
#한때는 새우잡이로 유명했던 볼음도, 지금은 철새들의 휴식처
어로 저지선으로 고기잡이를 못하게 되면서 주민 대부분은 농업이 주업이 됐다. 볼음도는 농지가 넓다. 논만 해도 55만 평이고 이 중 40만 평은 친환경 농법으로 경작된다고 한다. 현재 볼음도에는 160가구, 250여명이 살고 있다.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저수지 둑길에 오른다. 둑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섬 말도와 5.5㎞ 거리의 북한 연백군이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볼 수 없다. 저수지에는 큰 덩치의 새들이 모여 먹이를 찾아 잠수를 반복한다. 볼음도는 저어새 번식지이자 큰기러기, 알락꼬리마도요 등이 거쳐 가는 철새도래지다.
머지않아 새싹이 돋고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저수지 둑과 개간된 들판을 지나 봉화산으로 향한다. 볼음도 교회와 보건소가 있는 중심마을 보름도리도 지난다. 첫발을 내디뎠던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볼음도 트레킹은 남해 섬의 절경이나, 서해의 다도해 비경을 볼 수 없는 뭔가 밋밋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 무연한 갯벌 너머로부터 뭔가가 보름달처럼 서서히 차오르는 충만감을 준다. 그래서일까, 선착장에는 트레커들 외에도 젊은 백패커 여남은 명이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다.
1) 위 치
o 강화도 서도면 볼음도리
2) 가는 방법 : 강화도 선수선착장↔볼음도
o 선수-볼음-아차-느리 : 1일 3회 왕복
소요시간 : 볼음 약 1시간
* 운항시간 및 예약 : 여객선 예약 예매 '가고 싶은 섬' 홈페이지
- 전화 : 선수선착장(032, 932-6007), 삼보해운(032, 933-6975)
3) 볼음도 트레킹(13.6km, 3시간 30분, 난이도 하) - 강화나들길 13코스(볼음도길)
o 볼음도 선착장-물엄곶-조개골해변-영뜰해변-거무골-요옥산-서도은행나무-진뜰-봉화산-
당아래 마을-볼음도 선착장)
4) 볼음도 체험 민박집
o 나들길민박(010-9209-5101)
o 흙집민박(어촌계장, 032-932-6886)
o 섬마을민박(032-932-6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