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힘은 세다. 이번 외연도 방문은 지난 5월 8일 여수 손죽도에 갔을 때의 한 인연으로부터 시작됐다. 트레킹을 마친 내게 손죽도 수제막걸리를 선뜻 건네주던 분인데 사는 곳이 충남이라며 외연도와 삽시도를 추천해주었다.
외연도 동쪽 마당배해변의 기암괴석
마침 충남 보령 앞바다의 섬들을 가보려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외연도부터 가기로 한다. 외연도는 해안가 기암괴석과 천연기념물 136호인 상록수림, 그리고 서해안에서 접하지 못한 난바다와 산을 함께 즐길 수 있어 트래커는 물론 백패커들에게 널리 알려진 섬이다.
자욱한 해무에, 고요한 새벽이면 중국에서 닭울음소리 들리는 듯
대천항에서 8시에 출발하는 쾌속선 웨스트프론티어호
늘 연기에 가린 듯 까마득하게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외연도(外煙島)’는 보령 앞바다 70여 개의 섬 중 육지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고도다. 고요한 새벽이면 중국에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할 정도다. 대천항으로부터 약 50여 km의 거리에 위치해 쾌속선 ‘웨스트프론티어호’로 2시간가량 소요된다. 오전 8시 외연도행 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 20분 여수에서 출발해 7시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한다.
삽시도를 뒤로하고 호도로 향하는 쾌속선
인천항과 여수항에서 만났던 세련된 쾌속선들과는 달리 웨스트프론티어호는 작고 투박해 보인다. 승선 인원도 인천과 여수 쾌속선의 절반가량으로 200명에 못 미친다. 마치 비행기의 기장처럼 선장이 스피커를 통해 외연도까지 잘 모시겠다며 인사말을 하는데 “오늘 해상의 일기는 매우 좋은 편”이라는 말미가 안도감을 준다. 외연도 항로는 풍랑주의보가 자주 발효되는 데다 해무가 끼는 날이 많아 운항률이 79%로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호도 선착장 좌측 모습
배는 올해 말 개통이 예정된 ‘대천항~원산도 해저터널’ 위를 지나 육지와 점점 멀어져 간다. 우측에 삽시도를 두고 호도, 녹도를 지나는 무인도 근방 여기저기엔 많은 낚싯배가 닻을 내렸다. 배가 녹도를 벗어나면서부터 시퍼런 대나무 빛깔의 난바다가 펼쳐지는데 수평선은 어느새 하늘과 한통속이 되어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녹도를 벗어난 배가 외연열도에 속한 무인도를 지나고 있다
쾌속선의 스크루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이 협곡에서 흘러내린 급류처럼 더욱 사나워질 무렵, 전방으로 삼각형 모형의 섬이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한다. 섬의 아랫부분은 무대 위에서 낮게 피어오르는 옅은 드라이아이스로 빙 둘러친 듯 해무로 신비감을 자아낸다. 지척에 도달하기까지 외연도는 쉽사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다. 차츰 억겁의 세월 속에 외연도를 호위하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제 이름표를 드러내고 난 후에 비로소 외연도 최고봉 봉화산이 민낯을 드러낸다.
시퍼런 대나무 빛깔의 난바다에 아스라이 떠 있는 섬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러한 외연도를 외야대도(外也代島)로, 대동여지도에는 외안도(外安島)로 기록하고 있다. 북쪽 해안가 저지대 구릉에서는 삼국시대 전기의 패총이 발견되어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확인됐다. 또한 지리적 여건상 일찍이 중국과 교류가 빈번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중국 제나라 장수였던 전횡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중국 제나라 장수 전횡 장군을 모시는 사당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중국 제나라 왕의 동생인 전횡 장군은 제나라가 한나라에 패망하자, 따르던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외연도에 정착했다. 그러나 한 고조는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며, 끝까지 저항하면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전횡 장군은 한 고조가 토벌하러 올 경우 그동안 자신의 배후가 되었던 섬 주민들이 다칠 염려가 있어 군사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자결했다고 한다.
그 이후 섬 주민들은 의로운 죽음을 택한 전횡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위폐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2월 15일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전횡 장군은 2000여 년 전 중국 인물이면서도 외연도에서 풍어의 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당제를 지내는 동안 당주는 묵언을 해야 하며 당제에서 한복 3벌을 위패에 걸치고 ‘지태’라고 불리는 소를 제물로 올린다. 다른 당제에서는 보기 드문 전통으로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됐다.
외연도 둘레길 개념도/사진=보령시
해안선이 약 9km(면적 2.18㎢, 여의도의 0.75배)에 불과한 섬이지만 섬 여기저기에 놀라운 절경을 품고 있다. 서쪽의 망재산(171m)과 동쪽의 봉화산(279m), 그리고 중간의 당산(72m)이 빚어낸 해안 자락을 따라 섬을 시나브로 한 바퀴 돌다 보면 삿된 생각들이 사르르 사라진다.
돌삭금해변
고라금, 누적금, 돌삭금, 명금 등 지명도 보석 같다. 풍화의 손길이 조각품처럼 빚어낸 몽돌과 바위 위로 바다에 비친 햇빛이 반사되어 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붙여졌다.
햇살에 금빛처럼 반짝이는 몽돌해변..고라금, 누적금, 명금
명금해변
오전 9시 40분 외연도 선착장에 도착하여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안을 따라 섬을 시계 방향으로 돌기로 하고 선착장에서 300여 m 거리의 방파제로 향한다. 방파제 입구에서 우측으로 망재산 등산로가 있다.
외연도 선착장
그런데 방파제에 이를 무렵, 큰 물고기 같은 게 떠밀려와 부패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국내 해양보호생물 중 하나로 멸종위기의 상괭이다. 어구에 혼획됐다가 버려진 모양이다. 해마다 800~1000마리의 상괭이들이 우리나라 해안에서 폐사체로 발견된다는데 그중 하나다.
일출전망대에서 바라본 외연도 동쪽
일출전망대 지나 망재산 정상까지는 그리 가파르지 않다. 게다가 등산로는 동백숲으로 우거져 햇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드문드문 시퍼런 바다와 그 위로 연꽃처럼 솟아난 무마도, 독섬, 당산양도 등 외연열도의 무인도가 드러난다. 풍광에 취해 앞길 살피기를 소홀히 하던 차에 몸을 말고 있는 물체를 발견한다. 햇볕을 쬐러 나온 뱀인데 스틱으로 앞을 탁탁 쳐대자 못이기는 척 숲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망재봉 지나 고래조지로 가는 길의 소사나무 군락
망재봉에서 고래조지로 가는 길은 온통 소사나무 군락이다. 나무들이 하늘을 감싸, 햇볕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다. 고래조지는 망재봉 북쪽 사면의 지명인데 바다 쪽에서 보면 흘러내린 암릉이 고래의 성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려가는 길이 구불구불 가파른데 반대로 올라오는 트래커들을 만난다.
고래조지에서 바라본 횡견도와 그 너머 황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60대 후반쯤의 남자분이 리드하고 예닐곱의 여자분들이 뒤를 따르는데 방금 지나온 고래조지의 풍광이 굴업도의 개머리 능선과 흡사하다며 감탄들이다. 거센 바닷바람을 견디지 못해 나무조차 자라지 못하는 고래조지의 풍광은 압도적이다. 크기로 봐서는 인천 옹진의 굴업도 개머리능선보다 못 하지만 바다 위로 펼쳐지는 풍광은 오히려 앞선다.
이팝나무꽃이 한창인 고라금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대청도와 중청도
고래조지에서 해안 소로와 임도를 지나 내려오면 좌측에 고라금해변이 있다. 건너편에 대청도와 중청도를 품은 해안이다. 풍광은 참으로 아름다우나 해안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감흥을 반감시킨다. 상괭이 사체도 또 한 마리 떠밀려와 있는데 아까 방파제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부패되어 있다.
바닷속 몽돌들이 훤히 비치는 누적금
중국 제나라 전횡 장군을 모시는 당제와 천연기념물 136호 상록수림
누적금에서 돌삭금과 작은명금, 큰명금에 이르는 트레일은 고즈넉하고 편안하지만 해변에 이를 때마다 해안 쓰레기로 마음에 비가 내린다.
돌삭금에서 명금 가는 길
그러나 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다 하여 노랑배까지 가는 동안 찔레꽃, 서양민들레, 애기똥풀, 이팝나무 등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노랑배전망대에서 바라본 돌삭금해안
확 트인 노랑배전망대에서 시선을 좌측으로 돌리니 지나온 명금, 돌삭금해변 옆으로 대청·중청도가 보이고 그 너머의 황도가 조망된다. 또한 우측 너머로는 호도와 녹도는 물론 부속 무인도들이 아스라이 조망된다.
봉화산 정상의 봉화대터
노랑배에서 봉화산 기슭을 돌아 마당배로 넘어가는 둘레길이 있으나 정상에 올라봐야 비로소 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기에 봉화산 정상으로 향한다. 봉화산 정상에는 봉화대터(폭 7.8m, 둘레 24.5m)가 있는데 충청수영에 속한 봉수로 조선 초·중기에는 왜적과 바다 건너 중국을, 조선 후기에는 자주 출몰했던 이양선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봉수는 어청도에서 시작되어 외연도, 녹도, 원산도를 거쳐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의 망해정에 도달했다.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외연마을. 좌측의 봉우리가 망재봉이다
봉화산 정상의 동북쪽 조망은 숲에 가려 있지만 남서쪽으로는 시야가 확 트여 있는 망망대해다. 정상에서 하산로를 따라 약 1km 진행하면 당산삼거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당산 숲은 3천 평쯤 되는 공간에 거대한 후박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붉은 가시나무 등의 상록수림과 팽나무, 상수리나무, 고로쇠나무, 찰피 나무 등의 낙엽 활엽수들로 빼곡하다.
당산삼거리
예전에 이곳 상록수림 안에는 동백나무 연리지가 있었다. 각기 다른 뿌리에서 자란 두 그루의 동백나무 가지가 공중에서 맞닿아 하나의 가지로 이어진 이 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사랑나무라 불렀다. 예부터 사랑하는 남녀가 이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으나 2010년 태풍 곤파스의 피해로 죽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자리에 표지판이 세워져 그 흔적을 추억하고 있다.
당산의 아름드리 상록수림
전횡 장군 사당은 풍어당제 준비로 한창 바쁜 듯하다. 매년 음력 2월 15일에 당제를 지냈으나 지난해는 코로나로 인해 취소됐다. 올해는 날짜를 옮겨 5월 26일(음력 4월 15일) 개최했다. 이날 풍어당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전통행사로 전횡 장군 사당에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를 올리는 ‘당제’와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제’, 용왕에게 제를 올리는 ‘용왕제’로 진행됐다.
해변 노란 실거리나무꽃 군락지를 따라서 이어지는 마당배 둘레길
외연초등학교
당산에서 외연초등학교로 내려와 선착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 20분이다. 대천행 배 시간까지는 1시간 30분가량이 남아 선착장 우측으로 난 둘레길을 따라 마당배를 다녀오기로 한다.
마당배 가는 길
길 우측으로 여수 손죽도에서 보았던 실거리나무꽃이 군락을 이루며 노랗게 만발해 있다. 알고 보니 실거리나무는 외연도 이남의 서남해안에서 자생한다고 한다.
실거리나무 군락
마당배에는 그야말로 마당처럼 널따란 바위가 나오는데 바위 표면이 이색적으로 붉은 분홍빛이다. 조각처럼 서 있는 바위들은 먹음직스러운 카스테라 형상 같다.
아름다운 마당배 해안
그 너머 무인도 사이로 낚싯배를 탄 강태공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마당배에서 선착장으로 다시 돌아와 약 12km에 이르는 트레킹을 마감한다.
1) 위 치
o 충남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리
- 현재 117세대 38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초등학교에는 학생 3명+유치원 2명이 재학 중
2) 가는 방법 :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충남 보령시 대천항 중앙길 30 ☎1666-0990)
선착장에서 해삼의 내장을 손질하고 있는 주민들. 건너편의 산은 망재봉
o 외연도 들어갈 때는 대천→호도→녹도→외연도 순이나, 나올 때는 그 역순임
- 예매 : 가보고 싶은 섬(홈페이지, 앱)
〈대천 출발 → 외연도〉
- 08:00,14:00 하루 2회 운항 : 1시간 40분-선종(쾌속선)-요금 편도(16,500원)
〈외연도 출발 → 대천〉
- 09:50,15:50 하루 2회 운항 : 1시간 40분-선종(쾌속선)-요금 편도(16,500원)
* 계절별로 왕복시간이 조금 달라질 수 있어 사전에 확인해보고 가는 게 좋음.
o 주의사항 : 외연도는 가는 사람이 많아 현장 발매보다는 ’가보고 싶은 섬(홈페이지, 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