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섬 ‘내도’를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이 별처럼 떠올랐다.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 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1997년쯤으로 기억된다. 외도보타니아가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이다.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애들과 함께 첫 여행에 나선 곳이 거제 해금강과 외도였다. 당시 외도해상농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사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자연스러움은 덜했으나 지중해를 옮겨 놓은 듯한 이색적인 섬으로 느껴졌다. 특히, 해식 절벽 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탁 트인 망망대해 한려수도는 시원하고도 장쾌하기 그지없었다.
외도보타니아를 내도에서 바라보다
신선전망대에서 바라본 외도보타니아
그때는 건너편 좌측에 보이는 섬이 내도인 줄도 몰랐고, 더욱이 이십여 년이 흐른 뒤 내도에서 외도를 바라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켜켜이 쌓인 추억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인가 보다. 시간의 간극 속에서 내 인생과 가족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나짐 히크메트의 싯귀처럼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인 내도에서 바라본 구조라
비가 오락가락한 날씨, 거제 장승포에서 일운면 지세포를 지나 와현고개를 넘어서니 흐릿한 바다 위로 두 개의 섬이 나란히 떠 있다. 장승포나 일운면 쪽에서 볼 때 바깥 섬을 외도, 안쪽의 섬을 내도라고 한다. 1872년 제작된 거제지방 지도에는 내도를 내조라도(內助羅島)로 표기하고 있고, 섬이 거북이가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모자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도 몽돌해변
또한 외도는 남자 섬, 내도는 여자 섬이라 했는데 옛날 일본 대마도 인근에 있던 외도가 내도에 반해 구조라 마을을 향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놀란 동네 여인이 “섬이 떠온다”고 외치자, 그 자리에 멈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1982년 내도 분교 운동장에서 선시시대의 유적인 조개무지와 토기 등이 발견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조라항에서 2.6km의 거리에 있는 내도는 여의도의 0.34배에 달하는 작은 섬이다. 외도의 그늘에 가려져 여행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도는 2011년 한려해상국립공원 명품 마을로 지정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지금은 외도와 함께 거제 8경 중 제1경에 속한다.
초보자도 걷기 쉬운 길
외도가 사람의 손길을 거쳐 아름다운 식물공원으로 변했다면 내도는 원시의 모습 그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섬이다. 섬에는 동백과 후박나무, 왕작살나무 등 상록수림이 많고, 기암절벽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자연의 원시림이 숨 쉬는 곳
내도 명품길
1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구조라항을 출발한 배가 10여 분 만에 내도에 도착하자, 낚시도구니 아이스박스니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챙겨 나온 승객 30여 명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30~40대 부부와 또래의 친구들로 내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오는 여행객들이다. 세 명이 밤새 30마리 이상의 바닷고기를 낚았다는 낚시꾼들의 말이 들리기도 한다. 내도는 낚시하기에도 좋은 섬이라는데 틀린 말이 아닌듯하다.
편백나무 숲
자연이 품은 원시림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는 총 2.6km에 이른다. 탐방은 선착장에서 시계방향으로 시작된다. 등글둥글한 몽돌로 이뤄진 해변과 펜션 지대 사이를 지나면 편백나무 군락지와 만난다. 아직 유치원생인듯한 아이 둘을 동반한 젊은 부부가 앞서 천천히 걷고 있다.
세심전망대. 날씨가 좋을 때는 좌측으로 대마도가 보인다
편백군락을 지나 동박새 울음 우는 대숲 길을 지나면 첫 번째 전망대인 세심전망대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거제 서이말등대와 멀리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해상의 날씨가 흐릿하여 전망대 안내판을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세심전망대에서 연인길삼거리로 가는 숲길
세심전망대에서 연인길삼거리까지는 약 400여m에 이른다. 이 구간은 동백숲 구간으로 3~4월에 오면 떨어진 동백을 지르밟고 가야 할 정도로 동백이 만발한 길이다. 하지만 8월 중순에 이 길을 걷는 것도 매력이 있다. 좌측 낭떠러지 바다에서 들려오는 해조음과 원시림을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소롯길을 걷다 보면 두런두런 자신과 보보담(步步譚)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내가 내게 말을 건네며 걷는다, 보보담(步步譚)
연인길삼거리의 곰솔나무와 왕모시풀 군락
이어 연인들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면 더욱 애정이 깊어진다는 연인길삼거리다. 삼거리에는 백두대간이나 대관령 옛길을 걸으면서나 볼 수 있는 아름드리 곰솔 나무가 왕모시풀과 함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잎사귀에 녹색의 꽃이 피어있는 왕모시풀은 출혈을 단축시키는 효능이 있어 뱀에 물린데 효력을 보인다고 한다.
내도에서 본 외도보타니아. 멀리 해금강이 보인다
이 연인길삼거리에서 신선전망대에 이르면 외도보타니아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외도는 동도와 서도로 2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정원으로 가꿔진 곳은 서도다. 외도보타니아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마지막 장면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국내 관광객은 물론 일본 등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 의해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신선전망대에서 외도를 바라보니, 오래전 해금강을 거쳐 외도에 왔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당시에는 외도해상농원이라 불렸는데 2005년 이후 ‘외도보타니아(Botania)’로 바뀌었다. 보타니아는 보타닉+유토피아의 합성어로 ‘식물의 낙원’을 뜻한다. 외도를 다녀온 지 오래 되었음으로 외도도 그동안 많이 변했을 것이다.
내도 트레킹 종점
신선전망대에서 연인길삼거리로 다시 돌아와 내도탐방안내센터에 도착한다. 내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 코스가 짧아 초보자로 쉽게 돌아볼 수 있다. 곳곳마다 나무와 식물을 소개하는 푯말과 내도를 주제로 한 시 등 30여 개가 붙어있어 내도의 속살을 공부하기에 좋다.
내도 커피숍. 마을에서 공동 운영한다
내도탐방센터 커피숍에는 컵라면과 팥빙수, 아이스크림과 함께 내도 특산물을 활용한 내도유자차와 내도동백비누를 판매하고 있다. 내도 출신의 아주머니가 커피숍 서빙을 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때 30여 가구에 달하던 내도엔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여느 섬과 달리 육안으로 보이는 해안에 밀려온 쓰레기가 없다. 마을 사람들이 해변을 자주 청소하는 게 비결이란다. 참 정갈한 느낌이 드는 섬이다.
영화 ‘종려나무 숲’의 촬영지, 공곶이수목원도 들러볼 만
내도 탐방을 마치고 시간이 된다면 구조라항구에서 가까운 공곶이수목원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공곶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궁둥이처럼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57년 결혼한 강명식, 지상악 부부가 산비탈에 삽과 곡괭이로 1만 6000㎡ 되는 밭을 일궈 동백과 수선화, 종려나무 등을 수십 년 간 심어 조성했다. 노부부가 정성으로 오랫동안 길러온 종려나무와 손수 쌓아 올린 돌담이 운치를 더해 주기도 한다.
위로부터 외도보타니아, 내도, 공곶이, 지세포항
공곶이에 가려면 구조라에서 4km 떨어진 예구마을로 가야 한다. 거제 8경 중의 하나인 공곶이는 2005년 영화 ‘종려나무 숲’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와현 해변에서 400여m 떨어진 내도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