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계인 독일 본 출신의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i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준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오늘날 사람들에게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천재 작곡가이기도하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iwig van Beethoven, 1770~1827)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면,
베토벤에게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베토벤 자신도 자신의 인생에서 끝끝내 결혼이라는 단어가 완성되지 못할 미완의 것임을 깨달은 것도
평민 출신의 음악가로써 자신이 사랑하는 귀족신분 여성들에게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결혼은 계급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컸다.
게다가,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난청이 아무래도 연애 관계에 큰 걸림돌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음악가로써 명성은 쌓였지만, 작곡에 몰두할 때 보이는 기이한 행동과 종종 상식에 벗어난 행동으로
큰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기이한 행동을 이해할 만큼의 아량이 있는 여성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그에게는 잘 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음악가로써의 개성과 방대한 지식을 골고루 갖춘 출중함, 요샛말로 뇌섹남이였기에,
지체 높은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흔들기에 충분했으리라.
또한,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들과의 연애는 특이한 연애패턴이 반복됐기에더더욱 결혼과는 멀어진 것 일 수도 있다.
다른 남자와 깊은, 즉 이미 결혼을 앞두거나 미래를 약속한 상태에 있었던 여인들과 애착관계를 보였다.
즉, 애초부터 이룰 수 없는 사랑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거기에서 느끼는 무한한 고독을 통하여 예술가적 혼을 불어 넣어 창작의 불씨를 만들어 냈던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베토벤 자신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하지 못한 탓에 사랑하는 감정은 소중했으나,
지속적인 연애는 자신의 창작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것도 그의 사랑의 미완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결국, 베토벤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했다가, 막상 여자가 다가오면 물러나기 일쑤였다.
대체로는 구애하고 거절당하기를 반복하는 편이었다.
결국, 여인들은 그의 곁을 떠났고,
다른 귀족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하고,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좌절감을
마음 속 깊이 삼켜야 만 했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자신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줄기차게 헌정했다.
비록 사랑은 서툴러서, 결혼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여인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녀 만을 생각하며 ,
그녀를 위한 곡을 완성하고,
그녀에게오롯이 곡을 헌정하였다.
그 음악은 완벽했다.
1827년 베토벤 사후에 베토벤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 (Aton Felix Schindler, 1795~1864)가 베토벤의 서재에서 3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불멸의 연인(Unsterbliche Geliebte)'이라는 애칭을 쓴, 수취인 불명의 3통의 편지는 아직까지도 그 당시 베토벤이 흠모했던 여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구일까?라고 추측할 만한 정황적 근거를 통해서 그 여인을 가늠해 볼 뿐이다.
여기에 나오는 4명의 여인들은 베토벤이 한 때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그녀들을 위한 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이 중에 '불멸의 연인'이 존재한다.
그녀는 누구일까?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
베토벤이 이 편지를 쓴 년도와 장소는 불분명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7월 6일 월요일 아침부터 7월 7일 화요일에 걸쳐 세통의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또한 7월7일, 베토벤은 보헤미아의 온천 휴양지인 테플리츠로 갔고,
이후 테플리츠에서 카를바르트로 갔다는 것이다.
7월 6일이 월요일인 해와 베토벤의 사생활에서 여인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법한 해는 1812년이 유력하다. 베토벤이 1812년 만났을 여인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베토벤 연구가들의 불멸의 여인 찾기가 시작된다.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한번 보면,
"(생략) 내 마음속에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요... 기운 내요. 나의 진정한, 나의 유일한 보물이여, 당신은 나의 전부이고 나는 당신의 전부입니다."
"아직도 자리에 누워있지만 내 생각은 당신에게 달려갑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과 함께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당신 없이 살든지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나를 가장 행복하고도 가장 불행한 남자로 만들어 버렸군요. 내 나이에 안정되고 조용한 생활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나를 사랑해주세요. 오늘, 어제, 당신에 대한 이 갈망은 얼마나 눈물겨운지. 당신, 당신, 나의 삶, 나의 모든 것, 안녕. 계속해서 나를 사랑해주오. 당신이 사랑하는 자의 가장 충실한 마음을 절대로 오해하지 마오. 언제나 당신의, 언제나 나의, 언제나 우리의 L."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Josephine von Brunswick, 1779~1821), 위키피디아
가장, 첫번째 베토벤의 연인으로는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1779~1821)이다.
1799년 요제피네가 스무살 되던 해에, 네살 위인 언니 테레제와 함께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요제피네는 이미 27살 연상인 백작과 결혼을 앞둔 상태였음에도 베토벤의 연애패턴의 공식과도 같은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미 정략결혼을 약속한터여서, 그녀는후에결혼을한다.
1804년 다임백작이 돌연 사망하게 되었고, 네 아이의 엄마인 요제피네는 다시 베토벤과 사랑을 이어가려 했으나, 그녀 집안의 반대로 끝내 그들은 다시 헤어지고 만다.
이후 요제피네는 두번째, 세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국 파탄에 이르렀고,
1821년 42살 비운의 젊은 나이에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은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1805년)을 위해서피아노곡 <안단테 파보리> 을 헌정했다.
혹자는 베토벤이 요제피네애게 썼던 연애편지 내용과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 유사하다는 점과, 가장 오랫동안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했기에 그녀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토벤은 요제피네가 다임백작과 결혼을 함으로써, 그의 사랑이 끝나서, 마음 다 잡을 곳이 없었던 때였다.
그당시 줄리에타 역시, 젊은 작곡가인 벤첼 로베르트 갈렌베르그와 사귀고 있었고, 베토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베토벤의 전형적인 연애패턴의 방식이 점철된다.
결국, 베토벤의 사랑은 줄리에타가 갈렌베르그와 결혼하면서 막이 내린다.
1823년 베토벤은 그의 비서 쉰들러와의 대화 수첩에서 줄리에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녀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어. 자기 남편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했지. 그러나 그녀의 애인이 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어. 근데 그가 가난하다는 소식을 그녀에게서 들었어. 나는 한 부자를 만나 500플로린을 얻어서 그가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지. 그는 항상 나의 적이었어. 내가 항상 그에게 최대한 잘해준 것은 그 때문이야."
그녀와의 사랑은 비록 끝 났으나,
1801년 그가 사랑하는 동안 줄리에타에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익숙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 <월광> 을 헌정한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그녀를 향한 세기의 부러움은 불멸의 연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중에 하나인 곡을 헌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뭇여성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테레제 말파티( Therese Malfatti, 1792~ 1851)
세번째 연인에는 테레제 말파티(1792~1851)로 그녀는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요한 말파티의 조카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각종 질병과 귓병을 알고 있던 1809년, 아름다운 소녀 테레제가 베토벤엑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베토벤의 나이 40세에 17세의 테레제 사이의 큰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1809년 말부터 둘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보다, 23살의 나이차와 베토벤의 귓병을 이유로 그녀의 가족의 반대로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결국, 그녀와의 만남은 끝이 나고, 베토벤은 1810년 4월 27일에 테레제에게 <엘리제를 위하여>를 헌정한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악필로 테레제가 엘리제로 읽히면서, 제목이 바뀐 사연이 있다.
안토니 브렌타노 ( Antonie Brentano, 1780~1869), 위키피디아
마지막 네번째 베토벤의 연인은 불멸의 연인의 강력한 후보라 할 수 있는,안토니 브렌타노(1780~1869) 이다.
안토니는 18세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15살 연상인 프란츠 브렌타노와 결혼했으며, 베토벤이 그녀를 만났던 당시, 이미 그녀는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810년 요제피네와 줄리에타와의 실연이후,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그 둘의 사랑을이어갔다.
그녀가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되는 가장 확실한 증거에는 1812년 그녀는 베토벤과 가까이 살았고, 자주 만났으며, 7월 6일이 포함된 주간에 카를 바르트에 있었다.
안토니의 적극적인 구애로 한발짝 뒤로 물러서야 만 했을까?
베토벤의 고민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와의 교우관계를 져버리면서까지,
그에게서 그녀를 뺏어와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이 컸다.
그의 고민이 깊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브렌타노 부부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버렸고,
둘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 난다.
베토벤은 안토니에게는 <디아벨리 변주곡, 1812년>과 연가곡 <멀리있는 연인에게> 를 헌정하였다.
1816년 2월 베토벤은 안토니에게 보낸편지를 통해, 안토니와 안토니 남편 프란츠와의 깊은 우정에 대해이야기 한다.
"내 경애하는 친구에게. 당신과 당신의 친절한 남편인 프란츠 모두에게 나의 존재를 일깨워주고자 합니다. 동시에 나는 내 얼굴이 찍혀 있는 동판화를 보냅니다. (중략) 나는 당신과 프란츠에게 지상에서 가장 깊은 기쁨이 우리 영혼을 밝혀줄 그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생략) 하지만 당신에게 가장 진심의 인사를 보내며 당신 둘과 함께 지낸 시간을 기쁨으로 회상한다는 말을 덧붙여야겠군요. 내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그 시간들 말입니다. 진심 어린, 그리고 성실한 인사로써 당신의 찬미자이자 친구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최선은
그녀만을 위한 곡을 헌정하는 것이 그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완성이었을 것이다.
어느날은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또 다른 날은 요제피네 다임에게
비 개인 어느날은 테레제 말파티에게
마지막 날은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오! 나의 불멸의 연인이여...
참으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구나~
올해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회 및 연주회가 우리나라에서도 성대하게 기획돼 있었지만, 아쉽게도,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준비하고 있던 연주회 와 음악회 등이 취소 또는 축소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