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부터 시작해도 괜찮아

낙서가 그림이 되기까지

by JH


회사에서 퇴근 후, 나는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 삶에 대해 회사 사람들에게 굳이 알리지 않는다. 설명할 필요도, 받아야 할 관심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며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건, 모든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내게 그림은 일상이고 숨이고 놀이지만, 누군가에겐 낯설고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스타벅스의 프라푸치노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내가, 그 음료 없이는 하루를 못 버티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니, 나의 세계를 굳이 설명하거나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용히, 자연스럽게 그림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순간도 있다. 점심시간, 퇴근 후, 가끔은 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그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즐겁게 화방 위치, 좋은 종이 종류, 물감의 특성까지 세세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왜일까?

"시간이 없어서요."
"요즘은 여유가 없네요."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 밑바닥엔 ‘그림은 뭔가 특별하고 대단해야 한다’는 부담이 깔려 있었다. 나 역시 전시를 앞두고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오히려 펜을 잡기가 힘들어진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점점 더 큰 이벤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 그림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기법이나 재료 정보보다,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는 한 마디 아닐까.

“낙서부터 시작해도 괜찮아요.”



가장 좋은 그림 연습 시간은 언제일까? 나는 ‘지루한 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졸음과 싸우는 그 시간에 조용히 업무 수첩을 꺼내 든다. “예를 들어 앞에 앉은 동료의 머리 모양, 넥타이 무늬, 손가락 움직임만 포착해서 10초 안에 그려보는 식이다. 완성보다 '포착'에 집중하면 낙서가 훨씬 재미있어진다.” 누군가는 내가 회의에 집중하며 필기하는 줄 알고 흐뭇해하고, 나는 내 세계에서 자유롭게 선을 긋는다. 아무것도 아닌 낙서 한 줄이 그림이 되는 마법의 시간이다.


그림을 시작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 학원을 등록하거나 화실에 들어가보는 거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몸을 두면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인다. 비용이 들기에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되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일상 속 사물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겨울이면 귤껍질에 눈, 코, 입을 그려 표정을 만든다. 같은 귤껍질인데도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귤들을 만들어내며 나는 다시금 창조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게 그림은 아주 소박한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다. 중요한 건 ‘특별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 ‘오늘도 하나의 낙서를 해보자’는 가벼운 시작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낙서도 그림이고, 그림도 결국 놀이니까.


나 역시 한동안 그림에서 멀어졌었다. 도화지를 펼치면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완벽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나를 누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어느 날, 예전 같이 그림을 배웠던 친구들과 ‘30일 드로잉 챌린지’를 하게 됐다. 하루에 한 장씩, 30장을 그리는 프로젝트. 시작은 단순했지만, 하루하루 마감이 생기니 오히려 완벽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루 10분만 시간을 정하고, ‘사과 한 알’, ‘아기의 손’, ‘오늘 본 것 중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만 그리기로 했다. 그 이상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형태가 안 맞아도, 구도가 어색해도, 그냥 제출했다. 처음엔 적나라한 실력에 좌절도 했지만, 덕분에 스케치북 한 권, 두 권이 금세 채워졌다. 예전엔 한 번도 끝까지 써본 적 없는 스케치북이었다. 걸작은 아니지만, 그 안엔 다음 작업의 씨앗이 될 만한 그림들이 분명 있었다.


무엇보다, 매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정말 그림이 하기 싫은 날도, 스마일 하나는 그릴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하나, 둘, 그리고 싶어지는 것. 그렇게 선을 긋고, 면을 만들고, 점이 이어지며 나만의 시간이 쌓여갔다.


어느 날은 졸라맨도 힘들어서, 그냥 휘갈긴 선 몇 개가 전부였던 날도 있다. 그런데 그 선마저도 힘이 빠진 나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인지, 나에겐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젠 안다. 완벽하려고 애쓸 때보다,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그림도, 글도, 삶도.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돼. 그저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허용하고, 만끽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오늘도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수첩 한 귀퉁이에 조용히 낙서를 시작한다.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되고, 결국엔 나만의 그림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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