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시간 속, 나를 위한 드로잉

퇴근 후 드로잉 풍경, 오늘의 그림일기

by JH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가고, 퇴근 후에도 해야 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시 준비를 한다는 사실은 늘 마음 한켠에 있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자주 밀려나곤 했다. 나는 지하철 플랫폼에 섰다. 합정역에서 마곡나루역으로 가는 사이, 평소 같으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아이패드를 꺼내고, 드로잉 앱을 열고, 손끝으로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흘러가는 시간의 소매를 붙잡은 것만 같았다. 바쁘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도 내가 ‘나’로 숨 쉴 수 있는 아주 작고 선명한 틈이 생겼다. 이건 단지 그림이 아니었다. 나를 다시 중심에 놓는 일, 무너진 마음의 균형을 조금씩 되돌리는 의식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10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10분이 마치 하루 중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드로잉을 한다는 건 단지 뭔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다시 꺼내어 보는 일, 내 안의 소란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시간이었다. 아이패드 화면에 그려지는 호떡의 윤곽선 위로, 내 마음도 조심스럽게 얹혀졌다.


지하철 안, 카페 한쪽 자리,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 이전 같으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이제는 나만의 작은 작업실이 되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칸 안에서 나는 조용히 나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어폰도 없이, 음악도 없이, 화면 위의 선들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주변의 소음이 지워진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렇게 스쳐 지나갈 법한 찰나 속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마곡나루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며 다시 펜을 들었다. 그날 하루를 간단히 정리해두고 싶어 화면 위에 조용히 선을 얹었다. 사람들은 별것 아닌 순간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작은 반복이야말로, 멈춰 있던 나의 손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요즘 나는 리추얼 드로잉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인증을 주고받는 형태지만, 그 모임 덕분에 그림을 일상의 루틴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해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들이고 싶어 졌고, 그래서 퇴근 후 틈날 때마다 아이패드를 꺼내 드로잉을 시작한다. 생각만 하며 미루던 순간이었지만, 막상 앱을 열고 첫 선을 그어보니 의외로 쉽게 손이 움직였다. 연필 툴로 구도를 잡고, 요즘 자주 그리는 일상의 풍경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컵, 지하철 손잡이, 창밖의 나무 가지 같은 것들이다. 큰 브러시로 색을 슥슥 칠하니 단 5분 만에 전체적인 톤이 잡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지울 수 있다는 디지털 드로잉의 장점 덕분에 오히려 더 과감해졌다. 그렇게 집중한 지 30분, 막연했던 일상 속 장면이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형태가 이렇게 빠르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림을 완성한 뒤 온라인 드로잉 모임 게시판에 업로드했다. 멤버들이 남긴 댓글이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그림 색감 너무 좋아요', '구도도 자연스럽네요' 같은 말들이었다. 그냥 퇴근 후 틈을 내 그린 그림이었는데, 누군가와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머릿속에만 넣어두었던 이미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반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그 시간 안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꼭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손을 움직이며 나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이 충분했다. 그것이 회복의 시간이자, 창조의 순간이었다. 디지털 드로잉의 장점은 언제든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음'에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게는 커다란 자유로 다가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면 되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 그건 창작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감정의 변화였다.


카페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어폰을 낀 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직장인,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대학생, 책을 읽는 노년의 여성. 그들 사이에서 나는 아이패드를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점이 좋았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줄여준다.


그림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회복이었다. 10시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10분이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을 나에게 허락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찰나의 순간에 스며들어, 나를 잃지 않고 다시 꺼내어 놓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스케치를 한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만의 색을 칠한다. 그저 선 하나, 면 하나를 더해가는 일. 그 속에 담긴 건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마주친 아주 짧지만 진한 나와의 만남이다. 내일도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그림을 꺼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를 회복한다.


@artli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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