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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Jan 25. 2021

나를 지켜주는 건 그림뿐이었다

우울할 때마다 그림 한 점씩


회사를 다니면서 가끔 의욕 넘치는 일을 마주하곤 한다. 내겐 그런 일들이 바로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거나 신규 컨셉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작년 11월 우연한 기회로 새로운 형태의 모빌리티를 자유롭게 기획하게 되었다. 여러 업무를 동시에 진행해 시간을 100% 쏟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꽤 흥미롭게 진행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올해 조직개편이 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혼자서만 진행했던 일을 다른 팀과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업무를 하면 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올 테니 '함께'라는 시간에 은근 기대를 하였다.


그랬던 나의 기대는 시작부터 충격적이었다. '회의할 때 PPT좀 띄워줄래요?', '회의실을 안 잡았어?' 등의 잡무에 대한 당연한 요구와 함께 내 역할에 대한 통보가 이어졌다. 그 프로젝트는 우리 팀이 주관이 될 테니 PL은 누가 되고 너는 '퍼실리테이션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가 쏟아질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까진 그럭저럭 이해할만했다. 


이어서 상품기획을 할 줄 아냐는 둥, 전공이 무엇이냐는 둥, 동그란 시계와 네모난 시계의 UI, 인터랙션, IA에 대한 차이를 30초 내에 이야기를 해보라는 등의 말이 나왔다. 특히 동그란 시계와 네모난 시계에 대해 물어볼 땐 자신들의 팀원들은 대부분 30초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도 같이 꺼내는데 기가 찼다. 그 말을 인신공격과 사람에 대한 비교로 들었으면 나만의 착각인 걸까. 애써 대화를 훈훈하게 마무리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감정은 많이 상해있었다. 그 사람은 나의 자존심까지는 건들지 말았어야만 했다. 


이렇게 이상한 사람을 한번 만나면 마음이 뒤숭숭하다. 그 사람의 말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내가 그동안 배운 것들, 우리 팀 자체에 대한 회의감까지 몰려오게 되었다. 잠깐 우리 팀에 있는 게 맞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고 때마침 본사 신사업을 담당하는 조직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연락도 온터에 더 마음이 심란했다. 머리도 복잡하고 가슴도 복잡할 때 나를 지켜주는 건 그림뿐이었다.


머리도 복잡하고 가슴도 복잡할 때 나를 지켜주는 건 그림뿐이었다.





우울이 극에 차오를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나마 마음이 좀 안정되는 이유는 어쨌든 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타나니까 기분이 조금씩 나아진다. 색깔도, 형태도 내 마음대로 그려나갈 수 있고 어느 누구의 헛소리도 통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그림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중에게 사랑받고 많이 소비되는 그림을 그린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처럼 그저 내가 보는 것, 그리고 싶은 것을 나를 위해 그린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따뜻한 색감의 석고상과 음료수잔을 그려보면서 이 색깔도 칠해보고 저 색깔도 칠하며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몰두하는 순간 우울했던 마음이 한층 개는 느낌이다. 물론 불쾌한 마음이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눈 앞에서 내가 어떠한 펜터치나 색상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어떤 식으로 달라지는지 정신을 쏟다 보면 생각보다 마음이 한층 누그러진다. 결국 나를 지켜나가는 건 복잡한 머리가 아니라 투박한 내 손과 눈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방식, 원하는 색감과 톤으로 결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상처 입은 마음이 조금씩 아물어간다. 


앞으로 이상한 사람들을 계속 만날 테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으로 다친 마음을 위로해보려 한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내게 심리 치료제이고 신경 안정제이다. 그림을 통해 대단한 작품 하나를 완성해야겠다고 다짐하면 때론 내 마음의 짐이나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심리 치료제로 이 시간을 대하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위안이 된다. 세상이 내게 가혹할 때마다 연필 한 자루를 쥐고 낙서를 하고, 형태를 그리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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