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 처음 나가 느낀 단상들
일러스트레이션 학교를 다닐 땐 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회 일정이 발표되면 거기에 맞춰 작품을 쭉쭉 뽑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정확한 납기일이 있었고 그 납기일에 맞춰 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상을 살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정기적인 전시 일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과 전시회를 가지면 뭐라도 꾸준히 작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기면서 우연한 계기로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vol 11'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할 때만 하더라도 대략 1년이라는 시간이 있기에 여유로운 일정으로 준비를 하였지만 역시나 늘 그렇듯 페어가 시작되기 1개월 전 작품은 하나 둘 준비가 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벼락치기로 1개월 전 밤낮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나 6월에 난 내 인생 최대로 슬픈 일을 겪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를 거의 그림을 준비하며 이겨냈던 것 같다.
폭풍 같았던 페어 준비부터 시작해 어제 무사히 페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페어가 종료됨과 동시에 진한 느낌과 단상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다양한 마음과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은 참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페어에는 약 600여 명의 작가들이 총출동하였다. 신기한 점은 작가들마다 그림을 그려내는 화풍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페어를 찾는 사람들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가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만큼 내 취향도 더 정확히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비비드한 색감, 이국적인 분위기에 푹 빠져있고 거기다 커피, 디저트류가 함께하는 평온한 일상적인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벼락치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그림 한 점마다 생각할 시간과 그려낼 시간이 무르익어야 충분한 퀄리티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벼락치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 그려내기가 무척 벅찼던 기억이 난다. 불현듯 터지는 영감은 정말이지 특별한 경우이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겹겹이 쌓아 만든 실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벼락치기는 통하지 않으니 마감시간을 정해 성실히 작품을 그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페어였다.
페어에 나가지 않았다면 이런 이점은 몰랐을 것 같다. 바로 주변 동료 작가들과의 인연이다. 특히 내 옆에는 '밀'작가님이 계셔서 온라인으로만 봐왔던 작품을 아주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작가님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른 작가님과 어떻게 가까워져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작가님들이 꽤 많았다. 나도 용기를 내어 평소 어떤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무엇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등등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작가님들과 4일간 함께 하면서 약간은 친해질 수 있는 게 참 기쁘고 충만한 경험이었다. 내 작품을 알리는 것만큼이나 주변 동료 작가님들과 인연을 만들고 알아가는 시간 역시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라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관객에게 전달하는 친절한 설명 역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림만 잘 그리고 많이 그리면 끝인 줄 알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러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라는 사람을 보러 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어떤 굿즈를 만들었는지를 어떻게 매력적으로 표현하는지까지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큰둥하게 앉아있기만 하면 페어에 나와 사람들과 대면하는 의미가 없다.
"작가님,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듯해요."
"네 그건 감정을 담아서 그려 그런 것 같아요. 하하"
평소에 어디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아무리 친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작품 자체에 대해 깊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서만큼은 다르다.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모인 장소와 시간인만큼 대화의 범주도 밀집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질문도 다양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 질문에 대한 친절하고 사려 깊은 답변도 미리 준비될수록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관객도 중요하지만 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적절한 휴식과 중간중간 마실 수 있는 물 한잔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였다. 페어 첫날에는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지 감도 없었고 누가 경험담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무식하게 앉아 계속 부스에 오시는 분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했다. 밥도 못 먹으며 6시간 이상을 가만히 앉아 대화를 하다 보니 첫날에는 목이 쉬었고 허리가 너무 아팠다.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결국 오후 4시부터는 제대로 설명도 못하며 지친 얼굴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되었다. 이건 나에게도 찾아오시는 분들께도 마이너스였다. 그다음 날부터는 점심시간에는 제때 밥을 먹기 위해 30분 정도 나갔다 오고 중간중간 초콜릿도 먹었고 다른 사람들의 부스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를 위한 휴식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를 통해 나의 2021년 여름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피곤하기도 하고 때론 지치는 순간도 많았지만 분명 내 삶에 소중하고 진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믿는다. 진한 여운과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을 시간 속에 흘려보내기가 못내 아쉽기도 하다. 페어 첫날 너무 피곤하고 이번 페어 참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마무리를 하고 보니 또다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는 작품들을 성실하게 작업해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