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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Sep 10. 2021

그림으로 명확해지는 중입니다.

아빠 그림, 엄마 그림을 자꾸만 그리는 이유

엄마랑 막내 동생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번은 어떤 인도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너랑 엄마는 이렇게 여행을 하는데 아빠는 뭐하니?"

"음, 아빠는 돈을 벌고 계시지."

"아빠들은 인도나 한국이나 비슷한가 봐."


아저씨는 깔깔 웃으시면서 나중에 아빠도 꼭 여행을 보내드리라는 당부를 하였다. 언젠가 아빠에게 생신 선물로 인도든 유럽이든 보내드리고 싶었건만 아빠는 늘 한사코 거부하셨다. 아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과의 신뢰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나 조직보다는 '나 자신의 행복'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아빠는 늘 주변을 챙기셨고 책임을 지는 역할이었다. 가끔은 일을 내려놓고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인생을 즐겼으면 좋겠지만 일에 조금이라도 해가 미친다면 아빠는 언제나 개인의 시간보다는 사회에서의 시간에 집중하셨다. 20살에 대학을 가면서 집을 떠났으니 아빠의 책임감 있고 철두철미한 모습은 너무나 익숙하게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매김하였다. 


그림을 내 취미이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엄마가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고 왔을 때, 남편이 새 옷을 입었을 때, 아빠가 식사를 하실 때 어떤 자세와 표정을 취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구나 공평하게 24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모든 시간이 소중한 순간은 아닐 테다. 무수한 시간 속에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을 만끽한다 하더라도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과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무척 다르다. 사람에 대한 순간, 식물을 보고 느끼는 어렸을 적 추억, 노릇노릇한 빵 굽는 냄새는 분명 소중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행복의 조각들을 끄집어 내 화폭에 옮기는 순간 막연한 기억이 선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불명확한 기억을 다시 재편집해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재편집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내 감정 상태를 들여다보며 결국 나의 시간,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인도에서 어떤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아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지금은 바로 옆에 붙어있지 않아 볼 순 없지만 어렸을 적 멀리서 보는 아빠는 내겐 다정하셨지만 대게 심각하게 결정하실 때가 많았다. 아마 모든 가장들이 그러하듯 아빠 역시 사회에서 바라는 책임감으로 어깨가 늘 무거우셨을 테다. 이런 아빠의 모습 뒷모습을 볼 때면 아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때론 아빠가 텃밭을 일구시면서 "아빠가 직접 농사지은 상추다! 여긴 옥수수도 있어."라고 내게 말씀하실 때면 그렇게 해맑으실 수가 없다. 그 환경이 어떠하듯 아빠의 표정에 내 마음은 자연스레 꽃이 핀 것만 같다. 당시의 상황과 감정은 그림으로 옮겨질 때 좀 더 또렷해진다.  아빠가 책을 보실 때는 어떤 자세를 취하셨지? 안경은 어떤 색깔이었지? 이런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니면서 그림을 그려내기 위한 모든 감각이 일깨워지고 내 기억과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더욱 또렷해진다. 그래서 소중한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린다. 





회사를 마치고 그림을 그릴 때면 엉망으로 그려질 때도 많고 일단 시작하기가 버거울 때도 많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을 더욱 견고히 하고 내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천천히 그림을 그린다. 그게 사진처럼 아주 똑같이 잘 그린 그림이든, 연필로 몇 줄 그은 그림이든 결과는 상관이 없다. 그저 소중한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오롯이 기억하기 위한 과정이라면 언제 그림을 그려도 그저 힘이 생긴다. 그림을 그려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감정을 더욱 진하게 새기는 일련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내가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나의 감정을 돌이켜보고 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그림상자는 더욱 풍성해진다. 인상 깊은 순간이 많을수록 나의 감정도 풍부해지고 그릴 소재도 풍부해진다. 이런 찰나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뚜벅뚜벅 그림을 그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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