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완성되는 영감
페어에 나가거나 공모전에서 수상을 할 때 좋은 점은 새로운 인연들과 연결이 된다는 점이다. 때론 함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주기도 하고, 또 내가 제안을 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알게 되는 인연들을 통해 카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잡지, 책 표지를 작업해본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관심사가 다양해 식물, 요리,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협업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가 끝나고 어떤 식물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식물을 배송할 때 넣어주는 일러스트 카드가 필요한데 함께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나 역시 식물 키우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흔쾌히 승낙을 하여 빠르게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 후 식물 회사에서 주기적으로 3-4종의 식물 사진과 꽃말과 짧게 정리된 식물의 특징을 내게 전달해주었다. 그러면 자유롭게 받아본 식물에 대한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곧이어 이메일이 하나 왔다. '동백나무' 이미지들과 함께 글귀들이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만의 동백나무를 만들어 가는 시간, 나는 무언가 영감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동백나무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어떤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영감이 바로 '짜잔'하고 생각나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영감은 의도적인 노력에서 시작된다. 낯선 장소, 낯선 향수, 낯선 사진들을 보면서 영감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귀찮지만 일부러 새로운 카페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음악 앱을 켜서 자유롭게 음악을 들어보기도 한다. 이미지를 마구 수집해보기도 한다. 이때 다른 사람이 그린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사진 이미지를 위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백나무'에 대한 작품을 그려 나가야 할 때 마침 소문으로만 들었던 성수역의 카페를 찾아가게 되었다. 요즘 감성이란 게 이런 것일까. 시장 안에 떡하니 있는 카페는 빈티지한 멋이 느껴졌다. 시장은 소란스러웠지만 카페에선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벽면은 시멘트가 듬성듬성 뜯겼지만 어쩐지 오래된 추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낡은 문고리, 시계, 장롱, 컵까지도 반짝반짝 윤이 나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빈티지한 멋이 느껴졌다. '동백나무' 그림을 이 카페에서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나의 시점은 어린 시절로 옮겨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베란다에는 난초가 많았다. 작고 가냘픈 화분 뒤로 파란 양동이 화분이 있었다. 양동이 화분만큼이나 투박하게 큰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고 1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난초보다 새 잎사귀가 나는 것이 확실히 눈에 보여 꼬박꼬박 생각이 날 때마다 물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잎사귀만 나길래 길가의 가로수 같은 나무의 한 종류인가 보다 싶었는데 한 겨울, 2년 만에 처음 꽃이 피었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핀 빨간 꽃이 신기해 온 동네방네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드문드문 꽃이 피었지만 꽃망울 하나하나가 참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동백나무를 그리는 지금,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처음 느껴보는 '찬란한 아름다움'도 마주하기 어렵다. 그저 아련하고 아름다웠던 기억만 간직하고 있어 나만의 방식대로 동백나무를 그려보았다. 강렬하면서도 아련한 기억은 그렇게 색깔로, 형체로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영감의 마무리는 결국 나의 생각 속에서 매듭이 진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차곡차곡 연결하다 보면 나만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을 의도적으로 수집하여 차곡차곡 나만의 수집 창고에 쌓아 올린 뒤 결국 내 안에서 정제하여 작품으로 반영된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을 어렴풋하게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받은 영감들의 할 일은 모두 해낸 셈이다.
오늘부터는 '고무나무'를 그릴 차례이다. 또 어떤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로부터 나의 영감이 시작될지 모르겠다. 그 영감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