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시간을 사수하기 위하여,
'저기요, 블로그에서 검색하다가 궁금해서 메일 드려요.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메일을 열어보니 누군가 질문사항들을 몇 가지 적어 보냈다. 배경 설명은 없고 질문 사항에 대해서만 쭈욱 적혀있는 메일이었다. 그림을 홍보하고 박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작성하면서 종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문의를 받는다. 누군가 나의 의견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내 시간을 투자하는 데는 신중하다. 특히나 불친절한 메일을 받을 때면 내 시간에 대한 투자를 아끼게 된다. 차선책으로 공통적인 질문을 잘 모아놨다가 다시 블로그 글로 올리거나 그림을 올리면서 한꺼번에 대답을 하는 형태로 시간을 줄인다. 질문에 진심이 느껴질 때,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나의 시간과 마음을 쏟아붓는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거나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을 때는 '무시'하는 것도 내 시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나가는 과정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구상하는 시간, 그림을 슥슥 그려내는 시간, 굿즈를 만들고 포장하는 시간 등을 합치면 거의 한 달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8시간 동안 앉아 사람들에게 내가 그린 작품을 설명하고 SNS로 홍보하는 작업까지 더하면 수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시간을 투자할만하다. 이 시간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나의 그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니 시간을 충분히 투자할만하다. 나도 기쁘고 타인도 내 시간을 투자하는데 감사함을 느끼는데 보람차다.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내 모든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는지 미리 설계를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집중하려는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시간을 투자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도움이 안 되거나 오히려 해를 끼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일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리려는 대상을 유심히, 또렷하게 관찰해야 한다. 계속 쳐다보고 관찰하다 보면 대상의 감추어진 모습들까지 엿볼 수 있다. 사람 얼굴을 그리려고 하면 얼굴의 이목구비의 형태 판단을 물론이고 화장으로 가려진 점까지도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을 관찰하는 레이더는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미묘한 감정선이 흐를 때 민감하게 작동된다. 그림을 그리면서 학습된 관찰의 눈이 예민하게 사람의 외관과 행동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관찰을 하다 보면 사람이 감추고 싶어 하는 민낯까지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지만 눈빛과 말은 정 반대로 흘러갈 때면 약간의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고 느끼다 보면 관계는 예전으로 돌이키기가 어렵다. 본 이미지를 또렷하게 각인하는 훈련이 되어 아무리 이미지를 잊으려고 노력해도 각인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한없이 많고 그저 좋은 관계 속에서는 뭐든 순조롭게 흘러간다.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럴 수 있다. 좋은 상황만 이어진다면 세상에 나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고 상황은 계속 변화한다. 이때 '내 시간을 과연 투자할만한가?'라는 질문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상황이 나빠졌을 때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어떤 얼굴과 눈빛을 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지표가 된다.
내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빈둥거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의미 없는 치킨 모임을 안 가기로 결정했다. 한때 중요했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내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난 아무래도 내 작품을 그리고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 속에 영감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가는 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주말 나들이를 가는 시간,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 작업을 하는 시간 역시 모두 중요하다. 이왕이면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저 멀리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알려 나가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여행 가는 기분이네요.", "예쁘네요."라는 말을 해줄 때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한없이 기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업무, 그림을 그려 나가고 싶다. 나 역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께할만한 사람'인지 스스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