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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채워진 밤들과 나를 돌아 보는 시간...

나의 육아는 꺼져가는 촛불을 들고 어두운 산을 오르는 기분이였다...

by 미소마을

밤마다 취업공고 사이트를 확인하면서 이력서를 작성한다...

어쩌다 운 좋게 면접이 잡히게 되면 감사하지만

나처럼 경력단절이 길 경우에는 거의 연락이 없거나 서류에서 불합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도 나를 다시 찾고 싶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 손이 가는 아이들...

아플 때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는 당장 뛰어와서 살뜰히 봐 줄 사람이 전혀 없다.

아이 학교가 있는 시간에라도 일을 하고 싶지만 그런 일자리는 거의 없다.

눈이 빠지게 취업공고를 확인하지만 너무 멀거나 그런 일자리가 없다.

한마디로 꿈의 일자리는 존재 하지 않았다.


남편은 지금까지 뭐 했냐고 한다.

나는 애들을 혼자 돌봤다고 이야기해도 나는 한 게 없는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돈을 벌지 않았으니까 요즘은 세상에서 전업주부는 노는사람 취급 받는 것 같아서

정말 더 하기 싫어진다. 아니 힘이 빠진다.


남편이 2년 동안 해외근무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 둘을 혼자 키웠다.

부모의 부재와 학습 부재 등이 없게 더 열심히 교육시켰고

항상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이 느린 우리 둘째는 5년간 센터에 다녔는데

내가 항상 미디어를 보여주지 않고 말을 시키고 밖을 걷고

책을 읽으며 그렇게 내가 세상이 되어 줬다.

그래도 나는 한 게 없는 사람이다... 세상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니까...


작년 겨울 우리 집 막내가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에 걸렸다.

기침을 쏟아내며 잠도 못 자고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너무 짠했다.

하지만 나에겐 집에 돌봐야 할 첫째 딸도 있어 쉽게 아이를 입원 시키지 못했다.

"혹시 아이가 입원해야 되는데, 큰 애를 봐주 실 수 있어요 어머니?"

양가 부모님께 다 물어봤지만 안된다는 차가운 거절...

남편도 해외근무라 시차가 달라 전화도 잘 안되는 시절 나는 아이를 결국 입원 시키지 못하고

큰 아이는 다른 방에 재우고 학원에 오래 머물다 오라고 해서 간신히 버텼고

우리 막내는 이주 동안 내가 학교를 보내지 않고 집에서 매일 병원에 통원 치료를 하며 간신히 버텼다.


나는 이 순간이 너무 무서웠다. 나도 하나의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촛불에 의지해 깜깜한 밤

산을 오르는 기분마져 들었다. 그리고 더 서글퍼졌다.

그리고 내가 없으면 우리 아이들은 지금쯤 고아처럼 살았겠지... 이렇게 아플 때 도 다들 외면 하고 안된다는 현실이 정말 막막하고 무서웠다.

내가 처음 부터 일을 나갔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니면 어디서 부터 잘 못 된 걸까...

모든게 혼자 하는 상황이라 남편이 없고 애가 입원을 해도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

현실이 원망 스러웠다.

그 날 까만 밤에 해가 뜰때까지 펑펑 울었다. 정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인데 무기력해지고 항상 불안해져만 가는 나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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