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으로 10년 다닌 회사를 퇴사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이직도, 창업도, 프리랜서도 아닌 '일하지 않는 나'로 살며 진짜 내 모습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래서였을까?
10년 동안 쉼 없이 일했으니 기왕이면 특별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먼 곳으로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내겐 에너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집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러 본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지나자 그동안 외면해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입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 옷과 가방, 오래된 가구, 여기저기 꽂혀있는 책까지. 정리가 필요했다.
디자인, 소재, 색상이 모두 제각각인 가구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내 취향과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책장은 초등학생 때부터, 침대는 중학생 때부터 사용했으니 오죽할까. 새로 바꾸려고 할 때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이곳저곳 다니며 성심껏 고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구마다 고유의 추억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방에 있으면 답답했다. 퇴근하면 그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에 애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문득 과거 일하던 내가 떠올랐다. 신규 사무실 조성을 위해 디자인과 기능이 뛰어난 테이블과 의자를 고르던 모습, 전시를 기획하며 최상의 가구를 선택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의견을 묻던 모습.
나중에는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혹시 결혼할지도 모르잖아? 조금 참았다가 그때 바꾸지, 뭐.’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오지 않은 미래를 핑계 삼아, 현재의 욕구를 뒤로 미루고 또 미뤘다.
방을 내 취향에 맞게 꾸미고 정리하는 과정은 결론적으로 ‘나를 돌보는 일’이 되었다.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단순한 디자인을, 원목이 주는 안정감을, 그리고 따뜻한 색감을 좋아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취향이 조금씩 변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게 가구 몇 개를 새로 샀다. 온전히 나의 필요에 의해 직접 선택한 물건들이었다. 하나씩 배송되는 가구를 방 안에 들이며 작은 공간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뜯어보았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책장은 문을 달아 지저분한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했다. 침대 옆에는 작은 원목 협탁을 두었다. 이제 잠들기 전 읽던 책을 바로 올려둘 공간이 생겼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깜깜한 밤에도 언제든 불을 켜고 끌 수 있도록 작은 조명 하나를 구입한 일이다. 조명을 켜면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색의 빛이 방을 가득 비춘다.
나다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꼭 거창한 무언가를 해야 할까?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방을 꾸미고 물건을 정리하며 나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별것 아닌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