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어른들이 하라는 건하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생애주기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 통념에 따라, 사회에서 정해놓은 '평범한 삶'을 살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데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 그 시간 동안 참 이상하게도 나는 불안했다. 회사에 적응해서 내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면 되겠지'라는 막연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머리로는 행복해야 하는 게 맞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하라는 대로 하라는 삶만 살다가 막상 취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일에 익숙해지고 나니 허탈했다. 진짜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내가 잘살고 있는 게 맞나'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체로 나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막내'이자(연차가 쌓여도 왜 난 늘 막내인가), '젊은 여직원'의 역할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당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회사생활이 원래 이런 거지’,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한 건 사회통념에 충실히 따라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기준은 내가 아닌 '남'에게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자’.
'나만 참으면 되지' 같이 쓸데없는 배려로 중무장한 채. 그러나 연차가 쌓일수록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쌓였다.
입사 초, 업력이 상당한 공공기관임에도 제대로 정리된 업무 매뉴얼이 없어 고생했다. 다행히 나는 좋은 선배를 사수로 만나 제법 큰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며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바쁜 선배한테 모든 걸 의지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상사나 선배에게 깨지기도 했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유를 물어봐도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주변에서 위로랍시고 “그 팀장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같은 말을 해줄 뿐이었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상사의 기분에 맞춰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입사 1년 미만 직원들의 퇴사는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최근에는 꽤 오래 근무한 직원들의 퇴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만으로는 능력 있는 직원들의 퇴사를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채 회사를 떠나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운이 좋아 좋은 선배를 사수로 만났던 내가 특별한 케이스가 되는 현실이 씁쓸했다. 좋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게 하려면 지금의 조직문화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 같은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사람들과 오래 일하고 싶다.
일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명확한 기준과 합리적인 태도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위해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업무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육하는 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해보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복사기에 종이가 없으면 종이가 어디 있는지, 토너는 어떻게 갈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런 사소한 일들도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가 직접 도울 수 없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때마침 현장부서에서 지원부서로 발령받으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5년 넘게 방치되어있던 업무 매뉴얼을 전면 수정했다. 교육도 직접 진행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다. 직원들의 추가 교육 요청으로 각 사업장을 돌며 설명했다. 명확한 기준이 생기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좋은 사람들과 더 오래 함께 일하기 위해 고민하던 나의 노력이 그래도 헛되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퇴사하는 몇몇 후배들이 마지막 선물로 내게 손 편지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잠시 시간을 내는 일, 관심과 친절 같은 사소한 것들이 그때의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