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 일정만 말씀해 주시면 5~6페이지는 쭉 뽑아내죠!
중견회사에 다닐 때 계약서 작성 요청은 보통 메일로 받았다.
전반적으로 나이스한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대한 공손하게 메일로 상세한 내용을 써 주셨고, 기한도 넉넉히 3~5일로 정중히 업무를 요청해 주셨다.
가령 거래처와의 물품공급계약을 체결한다고 하면,
그동안 해당 부서에서 체결해 온 기존 계약서 양식을 바탕으로 금번 계약사항을 적용시켜 파일을 첨부해서 검토 요청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그런데....(하..........)
이런 친절하고 상식 있게 업무절차를 거치는 회사가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 것을 이후 이직을 통해 알게 되었다.
중소/스타트업 회사로 이직 후 나는 그만 계약서 자동판매기가 되고 말았다.
아니, 되어야만 했다.
이런 식이었다.
전략기획본부 본부장이 호출하여 노트와 펜을 들고 자리로 간다.
본부장 : 유과장 우리 이번에 경기도랑 계약 하나 할 거야.
유과장 : 아 어떤 계약이요?
본부장 : 그냥 거기 00 자연휴게소 있지? 거기에 우리가 빔 몇 개 넣고, 조형물 몇 개 넣어서, 빛과 휴식이라는 주제로 산책로 조성을 할 거거든? 그러니까 계약서 하나 준비해 놔.
유과장 : 주요 계약사항은요?
본부장 : 어 8천이고, VAT별도고, 빔 다섯 대 들어갈 거고, 우리 용역업체에 내리는 계약서도 별도로 있어야 하는 거 알지?, 아 그리고 시에서 지원사업받는 거라 조달청도 등록하고, 적당히 알아서 준비해. 계약서 초안은 내일까지 줘.
유과장 : 내일까지요???
이런 식으로 계약서 검토가 아닌 쌩으로 "창조" 요청을 갑자기 당(?)한다.
기 체결했던 유사계약서라도 있다면 레퍼런스가 되겠지만, 없다면 그야말로 워드 새 파일을 열고 쌩으로 1조부터 10 몇조까지 쭈욱~타자를 쳐야 한다.
거의 소설을 쓰듯 술술 마지막조항까지 몇 페이지고 지어내야 하는 것이다.
글 쓰는 거 좋아했더니, 아주 복 터졌다.
근데다가 저 계약서를 쓰기 위하여 내가 얻은 정보는 단 몇 가지.
심지어 확실하게 얻은 정보는 "대금"하나일 뿐.
나머지는 전부 불명확한 정보들 뿐이다.
빔은 어디에서 대여를 해서 넣는다는 것인지, 구매를 해서 넣는다는 것인지, 일정은 언제인지, 우리랑 상대측의 의무사항은 뭐인지, AS는 어떻게 협의할 것인지.
모르는 부분을 음영표시를 하며 계약서 글짓기를 해 나가다 보면 워드는 금방 하늘색 음영 투성이가 된다.
불명확한 부분이 한가득이라 계약서 초안의 완성도는 떨어지는데
심지어 기한은 "내일" ^^
내일이면 양반이다.
이번에 이직한 회사에서는 당일 처리를 요할 때가 부지기수다.
그나마 계약서 창조는 내 고유 업무이기라도 하다. (요청방식이 좀 예의 없지만)
그런데 조달청 등록은 대체 뭐냔 말이다!
물론 국책이나 별도의 팀이 있는 회사의 경우는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런 일이 아니어도 이상한 잡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나마 총무의 영역이랑 겹치는 부분은 어떻게 물어물어 대충 처리라도 하겠다.
그런데 지난번 회사에서 주어졌던 이상한 잡무는 정말 문과둥절 그 잡채.
나에게 회사가 운영하는 애플리케이션 내에 신규 사업을 제시하고 아이콘을 구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걸 법무팀에서 왜?라고 의문을 품으면 그들은 국내 모기업의 일 잘하는 직원 10 계명 같은 이상한 표어 같은 것을 긁어다가 슬랙에 날린다.
개발팀이 개발만 잘하고,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하는 회사는 망한다.
...
응. 그냥 망해라.(나의 진심)
사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이거 아닌가?
그냥 아무거나 시키는 거 다 해라.
저 멘트가 나온 기업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지간에 (실제로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 있다)
우리 회사에서 해석한 저 멘트는 이것이었다.
법무가 법무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기왕이면 사업제안도하고, 영업도 하고, 개발도 하라는 이상한 B급 멀티플레이어가 되라는 것.
아니 이럴 거면 경력직으로 왜 각 담당자를 뽑아다 앉혀놨는지 미지수다.
물론 그들의 말에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예전 기성회사와 달리 사회가 다각화되고, 하나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법무는 디자인알못이다.
정말 내가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강요할 때 이것은 잡무도 아닌 고문이 된다.
이제 복합 자판기가 되어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모든 기계가 그렇듯 전자레인지+오븐+에어프라이어처럼 섞어놓으면 잔고장이 심한 법.
심지어 셋 중 그 어느 것에도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다.
법무팀도 이제 법무만 고집하는 마인드에서는 조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업무 강화를 위한 연관업무의 확장이 아닌, 무리한 잡무는 이직을 부를 뿐이다.
모두들 회사에서 무슨 기계를 담당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계산기, 식기세척기, AI봇 뭐 잔뜩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우리는 예의 있는 업무요청과 상식적으로 납득가능한 업무 범위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