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그때보다 너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지금이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왔다. 거실에 틀어놓은 TV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것 말고는 고요하다.
책상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아, 책이나 읽을까 잠시 고민했다.
멍하니 꽂힌 책들을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복잡한 마음 상태로 참 책이 잘도 읽히겠다.’
몸을 돌려 책상 왼쪽에 놓인 컴퓨터 데스크로 바퀴의자를 틀어 앉았다.
딱히 할 건 없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새로 올라온 방명록이 없나 체크해 본다.
별다른 업데이트가 없기에 다른 친구들의 싸이월드를 구경하다가 우리 과 아이들의 미니홈피도 쭉 들려보았다.
술병이 나뒹굴고 이해할 수 없는 엽기사진들부터, 얼굴의 반쯤은 손으로 가린 세상 똥폼 다 잡은 남자애들의 사진까지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이제 곧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요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기 전에 컴퓨터를 꼭 켜보게 된다.
학교에서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를 드러내지 않고 각자의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우리.
진철이의 싸이월드 일기를 본 이후에는 오히려 내가 더 그 아이를 쳐다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를 이렇게 하나씩 퍼즐을 맞추며 알아가서 그럴까.
그 사랑의 실체가 슬슬 맞춰진 퍼즐 속에 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두 눈을 질끈 감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뻐야 하는데, 자꾸만 실눈을 뜨고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며 바라보다가, 나여야 해. 그래 나였어야 해. 처음부터 나였어야지. 라며 입가에 미소 짓는.
왜 이렇게 쉬운 게 없을까.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나의 상황과, 어차피 대학 2년만 졸업하면 런던으로 돌아갈 예정인 기한이 정해진 인연의 시작과 어느 것 하나 답 없이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왔다.
종우랑 연애를 시작할 때에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온 우주가 종우와 나를 축복하는 듯했고, 모든 상황이 서로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끼워 맞춰졌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듯 시작했던 사랑과 익숙함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장애물이었고, 서로의 조합은 앤틱과 모던 가구만큼이나 따로 놀았다. 우리가 자란 환경과 성격 그리고 성향 모든 게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서로를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 사실을 서로 의식해 버렸다.
비록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의 이러한 변화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피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심할 뿐이다.
네이트온 로그인 소리가 들려왔고, '[진철] 혼자서만 하는 사랑...? 님이 로그인하셨습니다'라는 팝업이 모니터 우측 하단에 올라왔다.
이렇게나 대책 없이 네이트온에서 기다려봤자, 사실 말 한마디 걸기도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철이는 PC방 알바를 시작했고, 알바 중에 로그인한 것이라 바빠서 제대로 된 대화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갑자기 알바를 하게 된 이유는 정지당한 휴대폰을 풀기 위해서란다.
진철이의 휴대폰은 몇 달치 요금을 내지 않아, 걸려오는 전화만 받을 수 있는 수동적 삐삐 같은 것이었다.
불편할 법도 한데 워낙 방과후면 남자아이들과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라, 휴대폰 같은 연락 수단은 딱히 큰 필요가 없었나 보다.
과 아이들도 진철이를 찾고 싶으면 언제나 근처에 있기에 곧바로 소통이 가능했고, 혹시 안 보인다 해도 학교 앞 당구장 또는 PC방에서 어김없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철이가 PC방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것은 참새가 방앗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어쨌거나 휴대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네이트온뿐이다.
그래서 난 저녁만 먹으면 자연스레 컴퓨터를 켜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 대화명이 또 바뀌지 않았을까 확인도 하고, 혹시 운이 좋으면 짧은 대화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우리 영어 단어 시험범위 어디야?"
오늘은 운이 좋게도 진철이가 먼저 대화창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난 시험범위를 알려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진철이는 옆반 반대표인 준호와 준호의 교회 친구까지 함께 세 명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별로 힘든 일은 없지만 야간 아르바이트라 피곤하다는 이야기.
그렇지만 게임을 실컷 할 수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 등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근데 넌 왜 안 자고 컴퓨터 하고 있어?"
진철이가 물었다.
"그냥 기분이 좀 우울해서 "
나의 의외의 말에 진철이가 평소보다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왜 우울해?"
나의 이중적인 아니 모순적인 행동들과, 기분들에 대하여 오늘은 그냥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슬그머니 한번 말해보고 싶었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겨서, 종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게 너무 충격이라 우울하네"
난 조금은 뜸을 들이다가 엔터를 눌러버렸다.
"누군지 알겠다."
진철이의 대답을 예상은 했다. 그랬을 것이다. 내가 그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말없이 다른 아이들과만 이야기를 나눈 모든 날들 속에서도 그 아이에게 내 마음의 바람이 가서 닿았을 테니.
이미 내 얼굴과 표정 속에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음을 다 들켜버릴 만큼 행복한 웃음들이 가득했으니까.
소울메이트처럼 눈빛만으로 대화를 했던 그 아이는 그 사인을 그냥 모른 채 지나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좋아. 나도 내가 좋아하는 애가 누군지 말해줄게. "
채팅 창 속 진철이의 대화가 빠르게 올라왔다.
내가 한 발자국 다가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그건 바로 너야"
막을 수 없던 일이었다.
매사에 솔직히 표현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 아이는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적당히 진지하게 또 적당히 장난스럽게 스치는 대화처럼 그렇게 말했다.
장난치지 말라는 나의 말에, 알 수 없는 웃음만 날리고는 일하러 가야 한다고 급히 네이트온을 로그아웃 해 버린 린 그 아이.
어차피 더는 이을 말도 없었다. 그렇게 듣고 싶었고 알고 싶었던 일이 사실임을 확인했을 때.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을 만큼 다시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그 시절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 아이는 나에게는 에펠탑처럼 내가 잡을 수 없는 단순한 상상과 동경의 대상이기를 바랐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수업 시간에 진철이가 옆에 앉았다.
그간 알게 모르게 서로 피했던 공백이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주었고,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었다.
오랜만의 일상이었다.
쉬는 시간에 진철이는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왜 뜬금없이"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냥 해. 한다. 가위바위보!"
진철이는 자기 마음대로 급하게 게임을 하더니, 내가 졌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내 팔을 세게 때렸다.
"헉 뭐야 이게!"
나는 진짜 아팠지만,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심지어 나중에 그곳은 노랗게 멍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이진철 죽었어. 해보자 그래. "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가위바위보가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너여서겠지.'
우리의 마음을 숨긴 채 그저 이렇게 즐겁게 장난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그래도 전처럼 서로 외면하지 않고 모른척하지 않고, 같이 앉아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날의 장난스럽던 고백의 네이트온 대화는 서로 주고받지 않은 것으로 합의가 된 것일까.
서로 없었던 일인 척하는 것일까.
"손바닥 줘봐 봐"
진철이가 내 손을 끌어갔다. 그리고는 간지럽게 내 손바닥에 이렇게 썼다.
"P........ C............... 방 가자고?"
난 진철이가 적는 단어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가끔 수업시간에 할 말이 있을 때에도 진철이는 자주 손바닥 글씨를 써주곤 했었는데, 한 번은 진짜 펜으로 글씨를 써준 적도 있었다. 그 글씨는 거의 이틀 동안이나 손을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손바닥 글씨라니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친구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너 지금 시험기 간인건 알고 있냐? PC방은 무슨, 집에 가서 공부나 해"
나는 가볍게 핀잔을 주고,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가자, 오랜만에 이 오빠랑 데이트 어때?"
진철이가 능청을 떨었다.
"웃기셔... "
나는 콧방귀를 뀌며 사물함에서 오늘 집에 가서 공부할 여객발권책을 꺼내 까만색 내 파일에 넣었다.
사물함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에도 진철이는 끊임없이 촐싹거리며 조르고 있었다.
"아휴 정말 시끄러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내가 성가셔하며 말했더니 진철이가 갑자기 성큼성큼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게 내가 힘을 안 썼더니, 까불어~"
갑자기 진철이가 내 양쪽 팔목을 잡더니 사물함으로 밀쳤다.
"... 어 뭐야?"
저항할 틈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여진 나는 당황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3호관 사물함이 있는 현관 로비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얇은 내 손목을 세게 잡은 진철이는 정말 힘으로 사물함 옆 벽에 내 등이 붙도록 밀쳐 밀착시키고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무 가깝다.
방금 전까지 촐싹거리며 장난기 넘치던 진철이었지만, 마주 본 그 눈빛에는 장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놀라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이 눈빛으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그 눈빛의 이야기를 읽어내려다, 오늘은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피했다.
자연스럽게 같이 수업을 들으며 보낸 일상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행복했기에 이 일상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모야 갑자기 너~ 하하… 좀 놓지?”
웃으면서 팔을 빼내려는데, 놔주지 않았다.
팔목에 전해지는 그 아이의 악력에 뭔가 모를 조심스러운 떨림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힘으로 나를 잡으려 하는 걸까.
난 무방비 상태로 그 아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그만 가자, 얼른 가서 시험공부해야지~"
몇 초 동안이었을까.
간신히 빠져나왔지만(놓아준 거겠지만) 바로 앞에서 느낀 그 향수향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옅은 담배향과 섞인 진한 향수향이었다.
진철이는 나를 그 품에서는 놓아주었지만, 손만큼은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난 손이 잡힌 채 반쯤 끌려 서둘러 3호관 정문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후문 마을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걸었다.
"너 내 마음 진짜 몰라?"
내 손을 끌며 조금은 앞서 걷던 진철이가 걸음을 맞추더니 약간은 따지듯 물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그 향수 향 때문일까 조금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오빠랑 데이트 좀 하다가 가자니까"
후문까지 걸어 마을버스 종점에 다다랐을 때에는 마을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진철이는 아쉬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우린 맨 뒷자리에 앉았다.
'하......... 학교에서 간이 부었네.......'
난 조금 전 나를 벽에 밀치고 바라보았던 진철이의 가까웠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주안역까지 오는 내내 진철이는 장난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난 잘 들리지 않았다.
꽉 잡힌 손 때문일까, 갑자기 다가온 그 아이의 돌발행동 때문일까. 시험기간이라 공부를 무리해서일까. 아니 기한이 정해진 한정된 인연의 시작이 두려워서일까.
며칠사이 태어나 처음 겪는 감정들과 고민들로 많이 스트레스가 쌓여있던 가운데, 오늘 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순간 왼쪽귀가 다시 정전되듯 주변 모든 소리가 꺼졌다가 돌아왔다.
다행히 지속되진 않았지만, 귀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순간의 어지러움에 눈빛이 흔들렸을 수는 있었다.
다행히 진철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 오늘은 위험하다.. 더 설레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어지러워 주저앉겠어...'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진철이는 오늘따라 어찌나 시끄럽게 촐싹거리고 장난을 치는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저 역에서 잘 헤어지면 된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하지만 갈수록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계속해서 PC방에서 조금만 놀다 가자는 진철이를 주안역 벤치에 앉히고 나도 옆에 앉았다.
"사실 오늘은 내가 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별로 심각한 병까진 아니지만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너 왜 그래?"
진철이는 내가 어지러워 눈빛이 흔들린 순간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아니다.."
굳이 몸 컨디션을 말해 걱정시킬 필요도 없고, 그냥 얼른 집에 가면 된다. 그냥 여기서 헤어지고 이 장난스럽고 즐거웠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른 집에 가자 시험공부해야지!"
너무 갑자기 일어났는지 또 한 번 몸이 살짝 흔들리는 걸 느낀 것도 잠시 아까 내 손목을 잡았던 그 두 손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뭐야.. 너 어디 아파?!"
아까만큼 가까운 너와의 이 거리.
마주 선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진철이의 눈을 보았다.
그 눈빛과 얼굴엔 이제 장난기는 전혀 없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다시 병이 재발할까 하는 두려움보다,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순수한 이 두 눈의 깊은 진심에 숨이 막혀 내 모든 마음이 들킬까 더 두려워졌다.
이 두 눈을 오래 들여다본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빠져들 것만 같았다.
"별일 아니야. 가자. 나중에 얘기해"
진철이의 손을 내 팔에서 천천히 내렸다.
천천히 전철역을 향해 걷는 동안 온갖 장난기가 가득했던 진철이는 아까와 달리 말이 없었다.
“잘 가~ 시험공부 잘하고 내일 보자~”
전철역에 도착해서야 난 입을 떼었다. 그러나 그런 내 인사에 진철이는 조금은 화난 듯 말했다.
"너 때문에 공부 하나도 안될 것 같아."
그리고는 토라진 듯 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험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진철이와 별다르게 부딪히지 않았다.
딱 한번 일어 청강시험 시간에 내 옆자리에 와서 앉긴 했지만, 그마저도 교수님이 떼어놓았다.
교수님은 진철이가 내 시험지를 베낄 목적으로 옆에 앉았다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 교수님 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이 나에게 다른 자리로 바꾸라고 하자, 뒤에 앉아있던 광준이가 말했다.
"교수님 진철이 형 표정 굳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