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만 하는 사랑?
작년 이 무렵에 나는 이 학교에 없었다.
학기 초 MT를 다녀오고 난 후 바로 휴학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학기 초 수업을 들어보지도 못한 채 곧바로 재수를 선택했다. 사실 자퇴를 더 원했지만, 만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반수를 결정하였다.
만일 1년 전 휴학이 아닌 자퇴를 선택했다면 내 평생의 여운이 될 이 추억들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치 않은 대학 원치 않은 학과에 그것도 대학의 자유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반별로 편성되어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고등학교의 연속인 것 같아 싫었다.
진정한 학문의 자유와 토론이 존재하는 곳, 본인의 책임감 하에 학점을 선택하고 스케줄을 짤 수 있는 대학생활을 동경했었다.
그러나 특정 직업에 최적화된 교육을 제공하는 전문대학의 특성상 자유는 없었다.
반끼리 몰려다니며, 동일한 수업을 들었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친한 무리를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를 사귀어야 하고, 무리에 몰려다녀야 하고 서로 그렇게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식적인 관계형성을 싫어했다. 단짝 한 명 정도 또는 그냥 혼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랬던 나였는데, 이제는 이 아이와 같은 반임에 감사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함에 감사했다.
같은 커리큘럼에 묶여 리포트나 시험문제에 대하여 그 아이와 함께 화제를 같이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더 꼼꼼히 예쁘게 필기한 일어노트를 빌려주고, 돌려받기 위하여 일부러 만나야 했음에 감사했다.
매일 아침 등교하여 딱딱한 1인용 책상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너는 언제 왔는지 앞자리 또는 옆자리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는데, 그 미소는 봄 그 자체였다.
나는 이 일괄적이고 경멸했던 전문대 커리큘럼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매일 같은 수업을 듣고 딱히 아무 대화가 없이 헤어진 방과 후에도 난 언제나 너를 떠올리며 버스에 올랐다.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도 언제나 그 아이가 올라타지 않을까 전철역 근처 마을 버스정류장을 두리번거렸다.
수업시간에 너의 존재는 떨어져 앉아도 마음만은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한 번은 수업 중 에어컨 바람이 세게 느껴져 팔짱을 끼며 몸을 추스른 적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했을 이 행동에 진철이는 수업 중 벌떡 일어나더니 교실 창가 쪽 자리에서 교실 입구 쪽 자리로 당당히 교수님을 가로질러 총총걸음으로 횡단하더니 에어컨을 끄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런 섬세한 배려에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진철이의 그러한 배려와 마음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 가끔 헷갈리게 굴 때도 있기는 했다.
하루는 청강하러 들어온 야간반 여자아이에게, 누군가를 소개해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보았다.
학기 초 어디서 봤는데, 마음에 든다는 둥 사귀어서 데리고 영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둥, 난 막 등교한 참이었다. 관심 없는 척 그 대화를 엿들으며 그들을 가로질러 대각선 방향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그날 하루종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없는 진철이에겐 당연한 행동일 수 있는데, 내가 왜 화가 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진철이가 한층 위 난간에서 고개를 빼고 나를 불렀다.
"야, 일본어 노트 내일 줄게"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지만, 그날따라 이름이 아닌 '야'라고 나를 부른 게 마음에 걸렸다. 흔한 이름이라 별로였지만,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만큼은 그 어감이 참 다정해서 좋았다. 그런데 “야”라니. 아니 생각해 보면 동급생끼리 당연한 호칭 아닌가.
이런 사소한 일들 하나까지 신경 쓰고 있는 내가 참 당황스러웠다.
가끔 책을 가져오지 않아 책상을 붙이고 같이 책을 보던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어, 같이 보던 교과서에 “나 주말에 소개팅할 거다~”라는 말도 안 되는 낙서를 한 적도 있다. 그날 진철이는, 주말에 소개팅하는 장소가 어딘지, 누가 소개팅을 시켜주는 건지 자세히 묻더니, 집에 갈 때까지 신경이 쓰였는지 교실을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뜬금없이 “가기만 해 봐. 가만 안 둔다”라고 따가운 경고를 날렸다.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협박이었다.
이러한 시답지 않은 일들 모두가 나에겐 시시콜콜한 캠퍼스 로망이었으며, 유치하지만 진지하고 순수했던 봄날의 추억들이었다.
기말시험기간에 접어들기 직전의 여유 있는 마지막 주였다. 오후에는 교양 볼링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경아와 여유롭게 학교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진철이가 따라왔다.
우리는 같이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강의실로 올라왔다.
칠판에는 '영어독해 휴강'이라고 적혀있었다.
2시간의 여유가 생긴 우리는 학교 안을 돌아다니다가, 연못가 벤치에 앉았다.
하필 나는 그날 까만 정장을 입고 등교를 했는데, 하교 후 외가의 장례식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까만 정장치마가 더럽혀질까 그냥 진철이 앞에 서서 왔다 갔다 하며, 연못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리 세 마리가 쪼르르 연못을 가로질렀다. 이제 막 여름의 시작으로 접어들 무렵이라 그런지, 모든 게 푸르르고 청량했다.
"너 오늘 좀 달라 보여"
진철이가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모른 척 진철이를 내려다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연못가의 느티나무잎을 흩날리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철이의 얼굴 사이로 이파리가 왔다갔다했다.
"어떻게 달라 보이는데?"
조금은 활발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냥 너한테서 빛이나. 그리고 너 다리가 참 예쁘다"
진철이는 빛이 난다는 말을 하며 손바닥을 내 주변으로 쭉쭉 뻗어 보였다.
'감정에 참 솔직한 아이구나.'
최대한 내 마음을 숨기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해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에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곪아 터질 듯 답답한 나와는 달리, 진철이는 속이 시원하고 직설적이어서 나를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이게 한국과 영국의 차이인가.
생각해 보면, 진철이는 수업시간에도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잘하는 편이었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하곤 했다.
가끔은 대범한 스킨십들에 적응이 안 되어, 피할 때도 많았다.
그날 오후가 그랬다.
연못에서 시간을 때운 우리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통나무 책상 양편으로 기다란 벤치 두 개가 놓인 4인용 야외테이블에 앉아 시험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나와 마주 보고 앉은 진철이는 차분히 공부를 하는가 싶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립글로스를 호기심 있게 집어 들었다. 그리곤 갑자기 발라주겠다며 엉덩이를 쑥 빼고 내 얼굴에 팔을 들이밀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의자뒤로 몸을 젖혔다.
"립글로스 발라줘보고 싶어! 이리 와봐!"
결국 진철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책상을 가로질러 내 입술에 립글로스를 살살 발라주었다. 경아는 그저 이런 우리를 재밌게 바라보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듯했다.
경아도 미국에서 살다가 와서 그런지 나만 혼자 유난스럽게 느끼는 것 같아 몰래 떨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나에게 립글로스를 발라준 진철이는, 이제는 일어나서 내 뒤로 오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묶어주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내 머리카락과 두피를 살살 쓸어 올릴 때, 나는 너무 떨려서 얼어버렸다.
그러나 진철이는 묶으려던 내 머리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다. 넌 머리 푸른 게 더 나아"
그래, 이런 정도의 스킨십은 외국 출신 친구들에겐 익숙한 일이겠지. 나는 부자연스럽게도 가만히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어색하지 않은 대처라고 판단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아는 남자친구가 데리러 와서 먼저 가고, 나는 사물함에 있는 우산을 가지고 학교를 나섰다. 당연히 진철이는 마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달라며 뻔뻔스럽게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쓴 우산이었다.
마을 버스정류장까지는 많이 멀지 않았지만, 거세지는 물줄기와, 우산 속의 가까운 그 아이와의 거리가 어색해서 서로 장난을 치며 걷다 보니 우리는 한쪽어깨씩 사이좋게 다 젖고 말았다.
풀어헤친 내 왼쪽 머리카락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고, 진철이의 오른쪽 어깨와 뺨에도 빗줄기 자욱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서로 머리를 감았네, 샤워를 했네 농담을 하며 버스 맨 뒷자리에 같이 앉았다.
비에 젖어 몸은 찝찝했지만, 왠지 마음은 너무 따듯했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고, 우린 사이좋게 비를 피하기도 맞기도 했다.
사랑이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구절이 떠올랐다.
우린 그렇게 우산 속에서 같은 추억을 나누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추억은 가끔은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았을까.
버스 안에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지만, 흠뻑 젖은 내 왼쪽 팔 옷소매는 축축했다가, 살에 따듯하게 달라붙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반쪽 샤워에 관하여 계속 농담을 주고받으며 연신 까르르 댔다.
그렇게 우리는 첫 비를 함께 맞았다.
그 무렵 독일 월드컵이 개막했고, 2002년 월드컵의 여운을 간직한 우리들이었기에 학교에서는 온통 축구 이야기로 가득했다. 경아도 신이 나서는 남자친구와 티셔츠를 맞췄다며 응원계획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업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기에 우리는 3호관 흡연실이 보이는 방향의 야외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호관 흡현실에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들락날락하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책을 들고 조금은 다급히 걸어오는 톰의 실루엣이 보였다.
막 도착한 톰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3호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벤치에 와 앉았다.
그리고는 나에게만 들리도록 가까이 고개를 내밀더니 조용히 말했다.
"내가 머리 푸른 게 낫다고 하니까. 안 묶고 푸르고 왔네. 순종적인데?"
그제야 어제 머리를 묶어주며 했던 그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의식을 했던가.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식하고 머리를 풀고 온 나보다 톰이 자기가 한 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생각보다 세심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명이다!! 3대 맞아!! "
톰은 3호관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 수를 세며 나에게 말했다.
"5명 나오는데, 어쩔 거야? "
나는 3호관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수를 세며 톰에게 말했다.
톰의 표정은 당황했지만, 이내 또 화색을 띄우며 말했다.
"봐. 지금 세명 더 들어갔어. 한대 대!!"
3호관 건물에 들어가는 수만큼 내가 맞고, 나오는 수만큼 진철이가 맞기로 했다.
이런 유치한 놀이로 시간을 때우며 여유롭게 느끼는 바깥바람이 좋았다.
슬슬 수업시작할 시간이 되어, 이제 들어갈까 하는 찰나 일어서는데 발이 삐걱였다.
"엇, 뭐지?"
신고 있던 구두 밑창을 보았다. 청록색 구두의 까만 굽부분이 빠져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서 빠졌던 건지, 하필 이런 상황에 구두 굽이 빠지다니 당황스러웠다.
"이리 줘봐, 그 상태로 다니면 위험해"
진철이는 내 발에서 구두를 벗기더니 통나무 야외 책상에 구두를 올려놓고 노트의 일부분을 찢어 구두굽의 틈 사이에 욱여넣고는 탁탁 두들겨서 고정시켜 주었다. 정말 감쪽같았다.
"오 생각보다 똑똑한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무슨 뜻이냐 그거 칭찬이냐?"
진철이는 고친 구두를 신겨주며 투덜거렸다.
"자 얼른 들어가자 이제 수업시작이야!"
경아가 말했다. 우리는 잠시의 여유를 아쉬워한 채 3호관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우리의 모습을 3층 흡연실에서 동희가 언뜻 본 것 같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매점에서 아까 게임에서 (3호관 나오고 들어간 수대로 때리기) 진 이유로 진철이에게 음료수를 사주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음료수를 마시던 진철이가 말했다.
"나 내일 안양으로 이사 간다"
안양에 아버지가 사신다고 했다.
"안양에서부터 학교까지 등교하려면 힘들겠다."
"어쩌겠어. 그래도 한국에 왔을 때 아버지 집에서 같이 사는 게 좋지. 영국에 있을 땐 자주 못 뵈거든"
진철이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엄마와 외삼촌을 따라 영국으로 열 살 때 이민을 갔다고 했다.
학교에서 유독 튀고 노는 아이처럼 굴어도, 그 속 깊숙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진철이를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지식했고, 버릇없게 구는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유쾌한듯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졌다.
점점 더 이 아이가 궁금했다.
주말 내내 온 나라는 월드컵 응원 열기로 가득했다.
지금쯤 남자친구와 응원을 간 경아는 얼마나 재밌을까 부러웠다.
종우가 군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도 종우랑 같이 응원을 갔을 텐데.
그러고 보니, 매일같이 오던 연락이 없는 이 공백의 상황에 더 이상 외로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자연스럽고 이렇게나 설레게 하루하루 보내도 되는 걸까. 괜한 괴로움이 느껴졌다.
'오늘은 안양으로 이사한댔지'
어제 진철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남자친구의 부재와 친구와 약속도 없는 주말을 그렇게 무료하게 보내다 저녁즈음 싸이월드나 할까 해서 컴퓨터를 켰다. 네이트온이 자동으로 로그인되었다.
노란 불 들어온 친구들이 누가 있나, 쭉 보던 중 진철이가 로그인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다만 반갑지 않은 표시인 다른 용무 중이었다.
그리고 대화명이 바뀐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혼자서만 하는 사랑….?'
'누구지, 진철이가 짝사랑을?'
매일 여기저기 들이대며 추파를 날리고 다니는 녀석이라 이렇게나 소심하게 짝사랑에 대한 대화명을 적어놓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
진철이 답지 않을뿐더러, 일단 그 짝사랑녀가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다른 용무 중이긴 하지만 이사는 잘 끝냈냐는 인사로 자연스럽게 대화창을 열었다.
잠시 후 게임을 끝냈다는 진철이의 답장이 왔다. 역시 게임 때문에 PC방에 가있는 거였다. 안양으로 이사를 가도 들르는 곳은 똑같구나 싶었다.
"근데 너 이 대화명 뭐냐? 천하의 이진철이? 그 야간반 아이한테 아직 작업 중이구만!"
최대한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아니야. 무슨 야간반이야. 내가 좋아하는 애는 다른 애야"
의외의 대답, 아니 예상한 대답이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럼 누군대?"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도 떨려왔다.
"말 못 해. 말하면 멸망이야.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 안 돼. 그러면 복잡해져"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진철이는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 그리고 네가 얼마 전에 파리까지 항공권 얼마냐고 물어봤잖아."
예약 발권시간에 CDG(프랑스 샤를드골 공항 코드)로 가상 발권을 하며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 돈을 모으고 싶다고 진철이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응. 돈 모아서 파리 꼭 가고 싶어! 근데 왜?"
진철이에게 되물었다.
"아니, 나 이번 여름방학에 영국 들어가는데, 같이 갈래? 먹여주고 재워줄게. 가는 길에 파리 경유하자"
비현실적인 대화를 마치고 진철이는 로그아웃하였다.
진철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더는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되면 마주할 현실이 두려웠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상황이니까.
그렇지만 진철이에게 자꾸만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 아이가 나에게 보내는 마음의 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자꾸 위험하게 조금씩 이렇게 그 마음을 드러내려 한다.
현실을 생각하니 복잡하고 한숨만 나온다.
걱정은 이쯤에서 멈추고 그저 비현실적인 파리여행의 상상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아이의 제안은 무모하다기보다는, 넌지듯 내민 손이었고, 마음이었고, 오히려 회피였다.
나는 그 아이의 그런 언어가 좋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서로 숨길 수 없는 무언가를 공유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서로 그 마음을 들켰지만, 그대로 족했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 만족스럽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이대로가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정도의 거리. 멀리서 바라보는 에펠탑처럼.
파리의 에펠탑 뒤로 저무는 노을을 상상해 본다.
그 장면을 떠올리니 그곳의 바람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 장면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숨 막히게 아름답다. 내 것이 아니어서 더 그렇다. 실제 두 눈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이기에 더 아름답다.
그러나 아직은 실제로 보지 못했기에, 그립다거나, 조급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그랬다.
시작하지 않았고, 시작할 수 없었지만, 이미 그 풍경은 가시화되었고,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다.
처음이었다. 네이트온의 대화내용을 A4용지 40장 분량으로 출력해서 일기장에 붙여본 것은.
그렇게 난 그날의 대화를 잡아두었다.
그날 이후부터 학교에서 우린 이상하리만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히려 피하거나 외면한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진철이는 수업시간에 굳이 내가 앉은자리의 근처에 앉지 않았으며, 언제나처럼 다른 남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게임 이야기나, 축구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남자애들과 몰려서 먼저 강의실을 나가버렸고, 한동안은 그렇게 별다르게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등굣길 버스에서 음악을 들으며 그 아이를 떠올렸고,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거면 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설렜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치마, 파란색 머리띠를 하고 온 날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직 강의실에 우리 반 아이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옷차림만큼이나 상큼하고 산뜻한 기분으로 3호관 자판기에서 믹스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흡연실 테라스에 나갔다.
평소 남자애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곳이고 좁은 공간이라 그리 낭만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여름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과 초록초록한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언듯 언듯 파리의 에펠탑을 상상하기엔 충분한 장소였다.
커피 한 모금에 팔짱을 끼우고 그렇게 조금은 먼 곳을 응시했다. 괜히 미소가 새어 나왔다.
"누나 왜 이렇게 오늘 상큼해? 반하겠는데?"
동희가 담배를 피우러 들어오며 말했다.
"와우 누나 오늘 진짜 상큼한걸!"
뒤따라 들어오던 광준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진철이가 따라 들어왔다.
좁은 흡연실 입구로 진철이는 들어왔고, 나는 동시에 스치듯 나갔다.
굳이 인사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냥 스쳤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날은 옷 때문인지, 단지 그 아이와 스쳤다는 사실 때문인지, 하루종일 밝은 기운을 풍겼던 것 같다.
반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수다도 떨어보고, 하루종일 웃고 즐거워했다.
난 그 아이를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그 아이의 눈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이렇게 언제나 봐주었구나.'
괜히 더 행복한 마음에 평소 나답지 않게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그냥 행복했다.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어도, 심지어 마주치지 않았어도.
충분히 우린 그날 우리를 감싸던 바람과 아이들의 수다소리와 우리의 웃음소리를 공유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싸이월드를 확인했다.
진철이의 싸이월드에 다이어리 코너가 새로 열린 게 보였다.
오늘자 일기에 N 뉴 표시가 깜빡이고 있었다.
.............(중략)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넘 좋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봐서 그런가..
그런데 말도 못 걸었다.. 넘 부끄러워
이건 내가 아니야..ㅠㅠ.. 미치겠다..ㅠㅠ..